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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세출의 투수' 최동원 별세

leekejh 2011. 9. 14. 10:19

 

'불세출의 투수' 최동원 별세(종합)

[연합뉴스] 2011년 09월 14일(수) 오전 07:28


(서울=연합뉴스) 천병혁 기자 = 한국 프로야구의 큰 별이 졌다.

경기도 일산병원은 1980년대 프로야구를 풍미했던 '불세출의 투수' 최동원 전 한화 이글스 코치가 지병으로 별세했다고 14일 발표했다. 향년 53세.

한화 코치로 있던 2007년 대장암 진단을 받은 고인은 한때 병세가 호전돼 2009년 한국야구위원회(KBO) 경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병세가 나빠져 경기도 포천 등지에서 요양해 왔다.

유족 측은 "최근 병세가 급격히 악화해 일산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왔다"고 전했다.

고인은 지난 7월22일 목동구장에서 열린 경남고와 군산상고 간의 레전드 매치에 경남고 대표로 참석했으나 경기에 뛰지 못하고 더그아웃을 지켰다.

그는 당시 수척한 모습이었지만 "다음에는 꼭 던지겠다"며 병마를 극복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올해 출범 서른 돌을 맞은 프로야구는 '영원한 3할 타자'인 장효조 전 삼성 2군 감독이 지난 7일 별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대 최고의 투수인 최동원마저 팬들의 곁을 떠나자 비통에 빠졌다.

경남고와 연세대를 거쳐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에서 활약한 최동원은 한국야구 100년사에서 선동열 전 삼성 라이온즈 감독과 더불어 최고의 투수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경남고 2학년이던 1975년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작성해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낸 그는 이듬해 군산상고를 상대로 탈삼진 20개를 솎아내 초고교급 투수 반열에 올랐다.

실업야구 롯데에 입단했던 1981년에는 최우수선수(MVP)와 다승왕, 최우수신인상을 싹쓸이하며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에이스로 군림했다.

현역시절 최고시속 150㎞를 웃도는 강속구와 낙차 큰 커브가 주무기였던 그는 특히 타자를 압도하는 승부 근성과 눈부신 연투 능력으로 '무쇠팔'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뒤 이듬해 프로에 진출한 최동원은 1984년 한국 야구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업적을 세웠다.

그 해 27승13패 6세이브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둬 정규리그 MVP로 뽑히며 롯데를 한국시리즈로 견인했다.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는 5경기에 등판해 혼자 4승(1패)을 따내 프로야구에서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프로야구 30년 동안 7전4선승제로 열리는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올린 투수는 최동원이 유일하다.

이듬해에도 20승을 올리는 등 롯데 에이스로 활약하던 최동원은 1988년 프로야구선수회 결성을 주도하다가 실패하고 나서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

삼성에서는 젊은 시절 지나치게 혹사당한 탓에 별다른 성적을 올리지 못하다가 1990년 시즌이 끝난 뒤 통산 103승74패 26세이브, 평균자책점 2.46의 성적을 남기고 은퇴했다.

은퇴 이후 한화 코치와 방송 해설가, KBO 경기운영위원 등으로 활동했으나 고인이 마지막으로 희망했던 고향팀 감독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고인의 친동생인 최수원 KBO 심판위원은 "최근 의식이 없는 상태였지만 잠시 눈을 뜨면 '괜찮다. 괜찮다'며 가족을 위로할 만큼 마지막까지 정신력을 보였지만 끝내 암을 이기지 못했다"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6일 오전 6시, 장지는 경기도 자유로청아공원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신현주 씨와 군 복무 중인 아들 기호 씨가 있다.

shoeless@yna.co.kr

(끝) �

 

 

 

 

 

'무쇠팔' 최동원, 선동열과의 우열 논쟁 끝나지도 않았는데…

[조이뉴스24] 2011년 09월 14일(수) 오전 10:08
<조이뉴스24>


[정명의기자] 하늘로 돌아간 별 최동원(전 한화 2군 감독)은 '국보투수'로 불리던 선동열(전 삼성 감독)과 늘 비교된 최고의 라이벌 투수였다. 아직도 야구계에는 '최동원과 선동열 중 누가 더 위대한 투수인가'라는 풀리지 않는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분명 우위를 가릴 수 없는 투수들이다. 둘 모두 자신만의 개성으로 한국 프로야구의 한 시대를 주름잡았다. 최동원의 투구폼이 역동적이었다면 선동열은 유연한 투구폼을 갖고 있었고, 최동원이 다양한 변화구로 타자들을 현혹시켰다면 선동열은 직구와 슬라이더 두 가지 구종만으로 타자들을 윽박질렀다.

이처럼 스타일이 완연히 다르기 때문에 위대한 두 투수를 비교하는 것은 늘 팬들 사이에서 개인적인 선호도의 문제로 귀결될 뿐 의미 없는 일이 되곤 한다.

하지만 한 가지, 연투능력에서는 분명 우열을 가릴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해서 최동원이 우위다.

프로야구 초창기 해태 타이거즈의 4번타자로 활약했던 김봉연 극동대 교수는 지난 7월 경남고-군산상고 '레전드 매치'를 앞두고 최동원의 손을 들어줬다. 김 교수는 "최동원이 한국시리즈에서 4승을 거뒀다"며 "절대 아무나 할 수 없는 기록이다. 선동열도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봉연 교수는 "선동열도 구위면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는 최고의 선수였다"면서도 "하지만 최동원은 완투 다음날에도 바로 경기에 나설 수 있었을 정도였지만, 선동열은 휴식이 필요했다"며 연투능력에서 최동원의 손을 들어줬다.



두 투수의 통산 기록을 살펴봐도 최동원이 왜 '무쇠팔'로 불리는지 알 수 있다. 최동원의 한 시즌 최다 투구 이닝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홀로 일궈냈던 1984년 기록한 284.2이닝. 선동열은 1986년 262.2이닝이 최고기록이다. 200이닝 이상 투구한 시즌도 최동원은 데뷔 첫 해이던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년 연속 기록했지만 선동열은 1986년이 유일하다.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따낸 진기록 역시 최동원이 왜 '강철어깨'인지를 잘 나타내준다.

물론 어깨를 혹사했을 수 있는 최동원이 선동열보다 유니폼을 빨리 벗긴 했다. 최동원은 프로 8시즌만에 현역에서 은퇴한데 반해 선동열은 한국에서 11년, 일본에서 4년 등 15년 동안 프로에서 뛰며 '국보'의 칭호를 얻었다. 뿐만 아니라 선동열은 프로 경력의 후반부 대부분을 마무리투수로 뛰어 투구이닝이나 연투능력만으로 두 투수의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최동원과 선동열이 라이벌로 비교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둘의 가치는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한국 프로야구 30년에서 최동원 외에 선동열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선수는 없었다. 전설과 비교되기 위해서는 전설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이제 별이 되어 하늘로 돌아간 최동원. 그가 하늘에서 빛나고 있는 동안 땅에서는 그의 찬란한 업적들이 영원히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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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사 故 최동원, 그를 키운 아버지 최윤식

[일간스포츠] 2011년 09월 14일(수) 오전 10:23
[일간스포츠 김우철]




누구보다 지기 싫어했던 승부사 고 최동원 감독을 키운 건 아버지 최윤식씨다. 최윤식씨는 최동원의 이름을 거론할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최윤식씨는 6·25 동란 때 파편이 박히는 부상으로 한쪽 다리를 잃어 의족을 차고 다녔다. 최동원이 제법 큰 뒤에도 술에 의지하는 나날이 계속됐다고 한다. 야구를 하던 장남 최동원은 참다 못해 폭탄 선언을 했다. "아버지가 술을 끊으면 한국 최고의 선수가 될 것이고, 술을 끊지 않으면 야구를 집어치우겠습니다."

아버지는 이때부터 아들의 성공을 위해 인생을 바쳤다. 집 앞 파밭에 마운드를 만들어 놓고 손수 코치노릇을 했다. 불편한 몸이었지만 아들의 공을 받아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부산 지역에 나오는 일본방송의 프로야구를 보며 '사설 코치'로 변신했다. 아침에 눈을 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최윤식씨는 최동원을 뒷바라지 하는 데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최동원은 "당신께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어 했지만 할아버지의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면서 내겐 '네가 운동을 하고 싶다면 시켜주겠다'며 아낌없이 지원해주셨다"고 부친에 대한 정을 드러냈다. 훈련 시간만 되면 아버지는 무서운 호랑이로 변신해 아들을 채찍질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유니폼은 커녕 양말을 빨 기회도 없었다고 한다. 최윤식씨가 최동원의 모든 생활을 뒷바라지하며 그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아들은 이런 아버지를 보며 승부 근성을 키웠다. 승리만을 생각했고,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했다. 아버지의 기대와 정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운드 위에서 조금이라도 틈을 보일 수가 없었던 이유다. 아들의 성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아버지에게 보답하는 일은 성공뿐이라는 사실을 최동원이 모를 리 없었다.

최윤식씨는 최동원이 프로 입단이나 연봉 문제로 구단과 마찰을 빚을 때도 적극 간여해 아들을 지원했다. 아들을 위해 비난조차 마다하지 않은 아버지였다. 최동원이 이런 아버지의 뜻을 묵묵히 따른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최동원은 "아버지께서 늘 주위의 이야기에 흔들리지 말라며 힘을 실어줬다. 또 즐겁게 열심히 사는 게 건강하게 사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신 인생의 멘토"라고 말했다.

김우철 기자 [beneat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