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 포 츠/한국 프로야구

[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 정근우의 낙구에 숨은 규칙과 심리

leekejh 2011. 10. 28. 17:28

[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 정근우의 낙구에 숨은 규칙과 심리

[OSEN] 2011년 10월 28일(금) 오전 07:25

프로야구 30년 레전드 베스트 10 선정 작업이 한창이던 올 여름, 한 방송사의 해설위원은 이런 말을 남겼다.
“아직은 이르지만 지금으로부터 10년이나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한번 레전드 베스트 10을 뽑는다면 2루수 부문은 아마도 정근우 선수의 차지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정근우 선수의 타구수비 처리능력은 정말 최고입니다.”

5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을 정도로 근래 들어 수년간 정상권의 전력을 잃지 않고 있는 SK의 경기들을 유심히 지켜본 야구팬이라면 굳이 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정근우의 농익은 수비력이 어느 경지에 이르렀는지를 가늠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정근우의 수비력은 이번 2011 한국시리즈에서도 그 빛을 유감없이 발산하고 있는데, 특히나 지난 10월 25일 대구에서의 1차전 6회말, 그가 잇달아 펼친 3차례의 환상수비 퍼레이드는 정근우표 수비가 왜 높은 평가를 받는 지를 여실히 보여준 장면들이라 말할 수 있다.

삼성의 선두타자 박석민의 우전안타성 땅볼타구를 몸을 날려 슬라이딩 캐치 후 1루에 정확히 송구해 타자주자를 잡아낸 것을 시작으로,

1사 만루의 위기상황에서는 신명철의 높이 뜬 플라이타구를 잡다 떨어뜨린 뒤, 당황하지 않고 무리한 홈 송구 대신, 커트맨으로 마운드 쪽으로 들어와 있던 1루수 박정권에게 연결해 3루주자 최형우의 득점을 막아냈으며, 이어진 2사 만루에서도 진갑용의 2루수와 우익수 사이에 떨어지는 바가지 안타성 타구를 전력으로 쫓아가 역방향으로 잡아내 자칫 대량실점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위기를 무실점으로 넘기는 엄청난 수비력을 보여주었다.

마치 오승환의 세이브처럼 수비수 한 명이 주는 임펙트가 이처럼 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느낀 순간이었다.

그런데 올 시즌 정근우 수비의 하이라이트로 기록될 1차전 6회말 수비에서 정근우가 자신의 머리 위에 높이 떠오른 신명철의 플라이 타구를 잡았다 놓치는 장면은 선수는 물론, 야구팬들과 관계자들을 알 듯 모를 듯한 복잡 미묘한 세상 속으로 잡아 끌며 많은 해석들을 양산해 냈는데, 연관된 규칙도 규칙이지만 이어진 플레이 안에 숨은 선수들의 심리에서도 공부가 될 만한 소재들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그 장면을 다시 한번 복기해 보도록 하겠다.

우선 정근우의 낙구상황에 얽혀 가장 논란이 컸던 인필드플라이 선언의 가능성 여부다. 법적으로 인필드플라이 규칙은 무사나 1사때 주자 1.2루 또는 만루 상황에서 타구가 내야에 높이 떴을 때 심판원이 그 타구의 포구여부와 상관없이 타자주자를 무조건 아웃으로 선언하는 내용이다.

그 이유는 야수가 타구를 고의로 잡지 않거나 떨어뜨려 다음 루로 뛰지 못하고 있는 주자들의 상황을 역이용, 2명 이상의 주자들을 한꺼번에 잡아보려는 수비측의 비신사적인 행위를 미연에 막고자 하기 위함이다.

이날 신명철이 친 플라이 타구는 1사 만루상황에서 나왔기 때문에 규칙적으로는 인필드플라이 선언이 내려질 수 있는 장면이었다.

통상적으로 심판원이 공격측 주자를 보호하기 위해 타구를 인필드플라이로 선언하는 시점은 플라이타구가 정점에서 떨어지기 시작한 이후가 된다. 여기에 덧붙여 참고가 되는 기준은 내야수(투수, 포수는 물론 내야에 위치한 외야수 포함)의 수비위치와 낙구 예상지점을 내야수가 완전히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는지의 여부가 추가가 된다.

이러한 관점상 인필드플라이로 선언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보였던 신명철의 타구가 경기 중 인필드플라이로 판정 받지 못한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신명철이 퍼 올린 타구는 생각보다 외야쪽으로 일정 부분 치우친 방향으로 낙구가 시작되었다. 1사 만루라는 상황을 감안 수비위치를 깊게 가져갈 수 없었던 2루수 정근우는 타구가 뜨자 낙구지점을 향해 후진했고, 공이 떨어지는 지점을 정확히 잡아 포구를 시도했지만 심판원은 이 지점을 내야수비의 보통 수비범위를 벗어난 위치로 판단했다.

화면상으로도 그라운드 내야범위를 어림해 곡선으로 둘러놓은 선에서 정근우는 한참 뒤로 물러난 지점에서 포구를 시도했고, 중견수가 정근우의 뒤쪽까지 접근 중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인필드플라이 규칙적용 가능타구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그림이었다.

물론 규칙에 잔디 선이나 베이스 라인 등을 임의의 경계선으로 설정해 판단을 내리면 안 된다는 조항이 담겨 있긴 하지만, 정근우의 위치가 꾀를 부려 주자를 2명 이상 잡아내는 꼼수를 두기에는 용이한 지역이 아니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다음 질문은 자연스레 고의낙구로 이어진다. 실제로 경기 후 정근우는 고의로 타구를 떨어뜨린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현장 관계자와 언론으로부터 받았던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고의낙구 역시 야수가 쉽게 잡을 수 있는 플라이타구를 잡았다가 일부러 떨어뜨리는 행위를 통해 공격측 주자를 2명 이상 한꺼번에 아웃 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제정된 규칙이다.

다만 인필드플라이 규칙과 다른 점은 고의낙구로 선언되면 볼 데드가 되어 주자들은 원래의 루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과 규칙 적용상황이 무사나 1사 주자 1루, 주자 1.2루, 주자 1.3루, 주자 만루일 때 등, 좀더 폭넓게 적용된다는 점 정도다.

낙구지점을 비교적 정확히 포착하고 달려간 정근우의 포구자세가 전혀 어려움이 없어 보였기에 고의낙구에 대한 보는 이들의 의구심은 그만큼 클 수 밖에 없었지만, 정근우는 이에 대해 묘한 웃음과 너무 깊게 생각한다는 정도의 짧은 말만을 답으로 대신했다.

정근우는 정말로 고의로 타구를 잡았다가 떨어뜨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까?

1) 플라이타구를 잡았다가 고의로 떨어뜨리면 고의낙구가 선언되고, 타자는 아웃 되며 주자들은 귀루하게 된다. 따라서 실점은 없다.

2) 만일 떨어뜨렸는데 고의낙구를 선언해 주지 않으면?

3) 그때는 공을 주워 아직 스타트를 끊지 못하고 있던 1루주자와 2루주자를 연달아 잡아내면 된다.

이 정도의 시나리오라면 정근우의 낙구상황을 대충은 뜯어 맞출 수도 있음직하다. 물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타자나 다른 주자들의 위치를 흘깃 신경 쓰다 저지른 단순한 실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의 핵심은 경기정황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SK는 삼성에 0-2로 끌려가고 있었다. 1사 만루의 위기에서 고의로 타구를 한번에 잡지 않고 떨어뜨리는 2차적인 행위를 통해 복수의 아웃카운트를 노리기엔 정근우의 수비위치나 점수차를 감안할 때 위험부담이 너무 커 보였다. 자칫 실패하는 날엔 추가실점으로 연결될 수 있고, 2점도 버거운 상태에서 그것은 마침표가 될 수 있었다.

다음은 포수 정상호의 3루주자 태그에 관한 심리다. 플라이타구였지만 정근우가 잡았다 놓침으로 해서 타구의 성격은 땅볼로 변질된 상태였다. 모든 주자 또한 진루의무가 없던 신분에서 갑자기 무조건 다음 루로 뛰어야 하는 포스 상태의 주자들로 처지가 급변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정근우-박정권-정상호로 이어진 송구가 3루주자 최형우보다 홈에 빨리 도달해 당연히 3루주자가 포스아웃 되었음에도 포수 정상호는 3루주자를 굳이 태그, 확인 사살하는 동작을 취했다.

불필요한 동작이었을까? 인필드플라이가 선언되었다면 3루주자는 태그를 해야만 아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주자였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상호가 알고 태그를 했건 무아지경에서 태그를 했건 결과론적으로 정상호의 태그동작은 의미가 있는 동작이었다. 타자주자 신명철도 타구를 쳐놓고 1루로 뛰다 말고 멀뚱히 서 있었을 정도로 인필드플라이 상황으로 오판할 수 있는 정신 없는 상황이었음을 고려하면 오히려 완전하고도 안전한 수비였다.

지난 5월 19일, 정근우는 롯데 전(문학구장) 6회초 1사 1루 상황에서 이대호가 친 타구가 자신의 머리 위로 높이 뜨자 직접 잡지 않고 땅에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을 주워 2루로 던져 1루주자 손아섭을 아웃 시켰던 전과(?)를 갖고 있다.

이른바 ‘주자 바꿔치기’ 기술로 발 빠른 손아섭을 느린 이대호로 교체해버리는 기지를 발휘한 것이었다. 잡다가 떨어뜨리면 고의낙구 적용을 받을 수도 있기에 아예 땅에 떨어진 다음 플레이를 가져가면 고의낙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플레이였다.

시간이 지나 나중에 이 글에 대한 팁을 달게 된다면 그때는 정근우에게 10월 25일 6회말 벌어진 상황에 대한 고해성사(?)를 직접 들은 다음이 될 것이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