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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왕국' 세운 女 알고보니 얼굴화상, 밤엔…

leekejh 2011. 11. 11. 10:13

 

              '미용왕국' 세운 女 알고보니 얼굴화상, 밤엔…
 
  맨손으로 출발해 전국 74개 직영점 ‘미용왕국’ 세운 준오헤어 강윤선 대표
 
 
                                                                               중앙일보이지영|   2011. 11. 10
 
대뜸 '가난 예찬론'을 펼치자는 게 아니다.

더 이상 개천의 용은 없다고 공공연히 떠드는 세상에서

남보다 못한 환경이 성공의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설 자리가 없다.

 

하지만 준오헤어 강윤선(51) 대표를 알고 나면

가난이 인간을 얼마나 성숙하게 하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는

" 가난 덕에 좌절할 틈도, 열등감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고 말했다.

 

 

강 대표를 만난 건 지난달 25일 서울 논현동 준오아카데미에서였다.

닷새 앞으로 다가온 '웰라 인터내셔널 트렌드 비전 어워드 2011' 준비로 한창 바쁠 때였다.

'웰라…'은 전 세계 89개국의 대표 미용사들이 모여 기량을 겨루는 대회다.

지난 8월 열린 국내 예선에서 1등을 한 준오헤어 디자이너가 한국 대표로 출전한다고 했다.

당초 취재 의도는 대회 소식과 더불어 헤어스타일 트렌드를 알아보는 데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그의 '일'에서 그의 '삶'으로 인터뷰의 초점이 옮겨갔다.

 

전국 74개 직영점, 2000여 명의 직원을 이끌고 있는 강 대표.

그의 오늘을 만든 원동력 세 가지를 꼽아보게 된 경위다.

'가난'과 '가족', 그리고 '꿈'이 키워드다.

 (30일 미국 뉴욕에서 치러진 대회 결과는 문자로 전해들었다.

  아쉽게도 순위권에 들지 못했다.

  하지만 강 대표의 메시지는 여전히 활기찼다.

  "세계가 준오를 이해하기엔 아직∼∼ ㅎㅎ"란다.

  그럴 줄 알았다.

  그는 어떤 일에도 풀이 죽는 성격이 아니다.).

글=이지영 기자 < jyleejoongang.co.kr >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shotgunjoongang.co.kr >

 

 

준오헤어 강윤선 대표가 서울 논현동 미용교육기관 '준오아카데미'에서 직원들의 실습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준오헤어의 정식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준오아카데미에서 30개월 동안 총 110학점을 이수해야 한다. 

가난 "가출도 사치, 콤플렉스도 사치"

강 대표는 1960년 서울 서대문구에서 태어났다. 쉰이 넘은 아버지와 마흔 넘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였다. 병석의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졌다. 강 대표도 열네 살부터 돈을 벌어야 했다. 집 근처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전수학교'라 불리던 야간 중학교에 들어갔고, 낮에 회사 사환일을 해 돈을 벌었다. 밤에 수업을 받을라치면 졸음이 쏟아졌다. 강 대표는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영어는 '아이 엠 강윤선' 밖에 몰랐다"고 했다.

 강 대표는 그 시절을 돌아보며 "주변에선 '고생 많다'며 안쓰러워했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돈 벌어 갖고 싶은 것 살 수 있는데 뭐가 힘드나 싶었다"는 것이다. 중학생 때 그는 아버지를 여의었고, 그의 '주경야독' 생활은 야간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계속됐다.

 그에게 반항기는 없었다. 사춘기도 조용히 지나갔다. "가족들이 한번도 내 일에 이래라저래라 한 적이 없어요. 내게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죠. 반항을 할 일도, 대상도 없었던 셈이에요. 만약 가출을 했다 하더라도 아무도 날 찾아나설 수 없었을 걸요."

 강 대표는 미인이다. 고두심 닮았다, 김보연 닮았다, 나경원 닮았다 등의 얘기를 많이 듣는다. 그런 그에게 숨기기 힘든 흉터가 있다. 화상 자국이다. 세 살 때 끓는 물 솥에 빠졌다고 했다. 흉터는 얼굴 오른쪽 옆면을 타고 내려와 목과 몸·팔까지 쭉 이어진다. 목의 흉터를 가리기 위해 그는 사계절 터틀넥 상의를 입는다.

 "외모에 신경을 썼으면 괴로웠겠죠. 세수도 겨우 하고 일하러 나가야 했던 사춘기를 보냈으니, 콤플렉스를 느낄 겨를이 없었어요."

 그는 "거울 보고 살면 자살할 사람 많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그에겐 거울 볼 틈을 주지 않았던 가난이 결국 약이었다.

 

 

2006년 서울 청담동 '애브뉴 준오'의 개업식 날.

맨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방송인 김미화씨다

 

가족 "착한 남편, 순한 아이들, 좋은 시어머니"

고등학교 1학년 때 강 대표는 학교를 그만뒀다. 미용을 배우고 싶어서였다. 1년제 무궁화고등기술학교에 들어갔다. 돈은 동네 미용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벌었다. 스무 살쯤 됐을 때 강 대표는 서울 상계동에서 개업을 했다. 동네 '일수 아줌마'에게 5부 이자로 돈을 빌려 창업자금을 댔다. 장사가 꽤 잘됐다. 미용 재료를 납품하던 재료상 주인이 다른 미용실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던 남동생을 직원으로 소개해줬다. 그 직원이 바로 지금의 남편, 김현철(50) 준오헤어 사장이다. 두 사람은 81년 서울 돈암동에 '준오미용실'을 열 때도 함께했다. 그리고 83년 결혼했다. 미용실 이름 '준오'는 그 뒤로 남편의 별칭이 됐다.

 "남편은 조용하고 섬세한 사람이에요. 꼼꼼하게 머리 만지는 걸 좋아하죠. 결혼할 때 그러더라고요. 우리 둘이 각각 '100점' 하겠다 용쓰지 말고, 한 사람이 '10점'이면 다른 한 사람이 '90점'해서 같이 '100점' 만들자고요."

 

 

1981년 서울 돈암동에서 문을 연 준오미용실 1호점. 

 

강 대표는 경영에 소질이 있었다. 사업 아이디어가 솟구쳤다. 생각이 떠오르면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93년엔 집 판 돈 1억5000만원으로 직원 15명과 함께 영국 비달사순아카데미로 유학을 떠났다. 체계적인 미용 교육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서다. 가족 입장에선 말릴 법한 일이었지만, 남편은 "당신의 그 무모한 긍정의 힘은 어디서 나오느냐"며 도리어 감탄해줬다.


 강 대표는 아이를 셋 낳았다. 경영을 전공한 스물여섯 살 첫째 딸은 현재 IT 회사에 다닌다. 둘째 아들은 군대에 가 있고, 97년 태어난 막내 아들은 미국 시애틀에서 유학 중이다. 강 대표가 아이들에게 꼭 가르치고 싶었던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어이고, 다른 하나는 인사 잘하는 품성이다. 강 대표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이뤘다고 자부한다. 셋 모두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보내 영어 문제를 해결했다. 아이들이 "이렇게 영어를 잘하게 된 것은 유학 덕"이라며 부모에게 "유학 보내줘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는 걸 보니 인사성도 제대로 갖춘 게 분명하다.

 강 대표가 집안일 걱정 없이 사업에 열중할 수 있었던 데는 시어머니의 공이 크다.

 "남편 백일 때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 시어머니 혼자 벌어 3남매를 키우셨죠. 그래서 밖에서 일하는 여자가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그만큼 대접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시죠. 25년을 함께 살며 애들 다 키워주셨는데, 내가 설거지만 해도 '우리 며느리 착하다'며 기특해하셨죠."

 

 

준오헤어의 직원들은 매월 한 권씩 필독서를 읽어야 한다.

강 대표는 "전 직원이 같은 책을 읽으면 공통의 언어가 생긴다"고 했다.

예를 들어 『혼·창·통』을 읽고는 "너 고객한테 '혼'을 들인 거냐"고 물을 수 있고,

『크리티컬 매스』를 읽은 뒤에는 "크리티컬 포인트가 어디야"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은 그동안 읽은 필독서를 준오아카데미 입구에 전시해둔 모습.


꿈"지나보니 다 꿈대로 됐더라"

강 대표는 통이 크다. 84년 돈암동에서 '준오미용실' 2호점을 내던 날에는 무형문화재 무속인 김금화씨를 불러 굿 공연을 했다. 사례비가 당시 돈 300만원이었다. 또 직영점 수가 여섯 개였던 87년 1억원을 들여 CI(기업이미지통합) 작업을 했다. '동네 미용실' 수준에선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강 대표는 그때부터 '세계 최고'를 꿈꿨다.

 "미용실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직원들한테 '우리는 세계 최고가 될 거야' '교수 만들어 줄게'라고 말했어요. 그런 얘기 몇 십 년 하니까 진짜 그렇게 되더라고요."

 

 

일정이 빼곡한 강 대표의 수첩.

 

꼭 해야 할 일을 정해두고 매일 저녁 점검하는 시간을 갖는다.

수첩 뒤에 놓인 종이가 '체크 리스트'다.

하루를 돌아보며

" 강윤선, 오늘도 수고했다! 그리고 윤선아, 고맙다! " 라며 스스로 격려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준오헤어 직원 2000여 명 중 연봉 1억원이 넘는 직원이 270명이다.

" 300명이 목표였는데 30명 부족해요."

강 대표의 꿈은 늘 준오헤어의 성장 속도를 앞지른다.


7년 전 CJ그룹 상무 출신의 황석기 공동대표를 영입해 온 것도 강 대표의 꿈이 이뤄진 사례다.

" CJ그룹에 강의하러 가서 처음 만났어요.

  딱 보고 '내게 부족한 부분을 메워줄 인재'란 생각이 들었어요.

  조직관리·마케팅 등에 적임자였죠.

  영입 제안을 했더니 처음엔 황당하다는 듯 웃으시더라고요.

  그 뒤 1년 동안 공을 들였어요.

  '삼고초려'가 아니라 '1년365고초려'를 했지요."

 그만큼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미용인은 조각가예요. 머리카락이 재료죠.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내 작품을 만드는 거예요. 헤어스타일 하나에 인물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아세요? 귀신이 머리에 리본 하나 꽂는 순간 더 이상 무섭지 않게 되잖아요. 롤프 옌센의 저서 『드림 소사이어티』를 보면 미래 사회에는 꿈과 감성을 파는 직업이 유망하다고 해요. 미용이 바로 그런 직업이지요."

 강 대표의 다음 꿈은 '미용 한류'다. 국내 직영점이 100개가 넘어서면 해외 지점을 낼 계획이다. 이름만 빌려주는 프랜차이즈 사업은 할 생각이 없다. "10년 이상 근무한 직원을 파견해 준오헤어의 정신까지 전파하겠다"는 포부다.

"자녀 양육 노하우? 엄마가 열심히 일하면 아이는 엄마 인정해요"

 

 

지난해 찍은 강 대표의 가족 사진.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작은아들·큰아들·첫째딸·강 대표·남편 김현철 준오헤어 사장이다.

 

강윤선 대표는 '일하는 엄마'들의 고충 상담에 익숙하다.

준오헤어의 직원 80%가량이 여성이다 보니,

자녀 양육 문제로 고민하는 엄마 직원들을 숱하게 만난다.

 그의 조언은 이렇다. "자녀에게 존경받는 엄마가 돼라"는 것이다. 자녀에겐 존경할 대상이 필요하다. 세종대왕도 존경스럽고 이순신 장군도 존경스럽지만, 너무 먼 존재다. 부모가 생활 속에서 존경의 대상이 돼줘야 한다. 그 존경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온다. 강 대표는 "엄마가 일을 열심히 해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자녀는 엄마를 인정한다"면서 "자식을 가르치려 하지 말고, 따라 할 모범이 돼라"고 했다.

 그러면서 "일에 몰두한다고 자녀에 대한 관심의 끈까지 놓아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3남매를 키운 강 대표는 스스로 겪은 시행착오를 '워킹맘'에게 공개했다. 막내아들이 어렸을 때 일이다.

 "육아는 시어머니와 도우미 아주머니가 주로 맡으셨죠. 낮에 아이가 말을 안 들을 때마다 '이러면 엄마한테 혼난다'라고 '위협'을 하셨답니다. 몇 년을 그렇게 키웠더니 아이에게 엄마가 '무서운 사람'이 돼버린 거죠. 초등 4학년쯤 됐을 때 아이가 엄마를 슬슬 피하면서…."

 위의 두 아이를 키울 때도 상황은 똑같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강 대표는 "아이마다 성향이 다르니, 다르게 키워야 한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그 후 막내 앞에선 일부러 실수도 하고 농담도 많이 하며 '웃긴 엄마' 노릇을 했다. 1년여 노력 끝에 모자 사이는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강 대표는 자녀를 믿는다. "부모가 최선을 다하면 아이는 잘 자란다"란 믿음이다. "중간에 잠깐 길을 벗어났다 하더라도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라니, 안심이다.

 

 [중앙일보 이지영.권혁재]

▶권혁재 기자의 블로그http://blog.joinsmsn.com/shotgun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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