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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겨여왕' 김연아_"난 늘 시합이 없길 바랐다… 다시는 시상대에 못 설 것 같아"

leekejh 2011. 11. 21. 23:56

 

  [최보식이 만난 사람]

 

       '피겨여왕' 김연아'

 

         "난 늘 시합이 없길 바랐다… 다시는 시상대에 못 설 것 같아"

               쿨한 성격, 발도 예뻐…오서 코치 파문 이해 안돼

 

                                                                            조선일보 | 최보식 선임기자 2011. 11. 21

 

 

김연아 선수는 검정색 의상에 군화처럼 목이 긴 검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나는 전혀 낯설지 않았지만, 그는 나를 보고 긴장한 것 같았다. 이 피겨여왕은 처음엔 낮은 목소리로 "예" "그렇죠" 단답(短答)을 반복했다.

―오늘 무얼 했나요?

"학교 수업을 듣고 운동하고…."

그는 3주 전부터 고려대 (체육교육학과 3년)에서 강의를 듣고 있다고 했다. 그전까지는 입학만 해놓았지 시합과 훈련 등으로 학교를 나간 적이 없었다.

 

↑ 김연아 선수는 “올림픽 금메달을 딴 뒤 선수생활은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시합이 기다렸다”고 말했다. / [조선일보]이태경기자 ecaro@chosun.com

 

 

 

 

―김 선수는 "대학생활이 궁금하고 그 생활을 느껴본 뒤 졸업하고 싶다"고 말한 적 있었지요. 지금은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그걸 즐기고 있나요?

"자주 가는 것도 아니고, 강의가 있을 때면 강의만 듣고 바로 떠나요. 함께 강의 듣는 학생들은 체육특기생이에요. 우연히 일반 학생들과 복도에서 마주쳐 소문이 돌면 강의실 유리창으로 몰려와 쳐다보기는 해요. 사실 어울리고 친하게 지내는 시간이 없어요."

―본인이 마음먹은 대로 사는 게 쉽지 않지요? 각종 공식행사는 물론이고 신차발표회, 도자기제품 출시 같은 기업행사까지 짜여진 스케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지요?

"간혹 어떤 행사장에 있을 때 '내가 왜 여기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래도 해야 되니까 해야지요. 내 의사는 아니더라도 말이죠."

―시합과 훈련을 위해 외국은 많이 다녔지만, 스케이트를 안 신고 링크에도 안 들르는 자유로운 여행을 해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전에는 시즌(시합) 준비로 하루 내내 운동에만 매달려요. 힘들어도 하고 싫은데도 해야 되죠. 그러고도 결과가 안 좋으면 스트레스를 받고. 내 머릿속에는 '제발 시합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았지요. 그때는 하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요즘에는 그런 생각도 안 들고, 학교도 다니고 다른 활동을 하니 이 정도면 만족하고 있어요."

―김연아 선수 곁에는 늘 엄마가 붙어있었지요. 스트레스를 엄마에게 풀었지요?

"쳇, 푸는 게 아니라 엄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웃음)."

―왜 엄마가 옆에서 잔소리해서? 사이가 안 좋았겠네.

"계속 안 좋았죠. 훈련하다 보면 충돌이 있잖아요. 커서는 이해하지만. 엄마는 '뭘 하라'고 쉽게 주문하는데 그 자체가 스트레스지요. 엄마가 직접 스케이트를 한번 타보라지, 어디 말처럼 쉽게 되나요. 저도 잘하고 싶은데 계속 주문이 들어오니…."

―본인도 자녀를 키우면 지금의 엄마처럼 할 건가요?

"엄마처럼 못 될 것 같아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저는 운동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내 자식에게는…, 너무 힘들어요."

― 밴쿠버 동계올림픽 금메달을 땄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지요?

"어떤 순간으로 치면 그런데, 하지만 순간은 지나가는 것이니까요, 다 지난 일이죠. 저는 시합과 훈련의 스트레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김연아 선수는 큰 시합에서도 표정의 변화가 없어요. 보고 있으면 '저 어린 나이에' 하는 마음이 절로 들어요.

"흔히 말해 쿨한 편이에요. 실수하거나 결과가 안 좋아도 쉽게 잊어버려요. 하나에 꽂혀 깊게 생각하지 않아요. 다른 소심한 선수들은 아무리 심리치료를 받아도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시합을 앞두고도 너무 편해 보여 주변에서 안달이에요."

―정말 속으로도 안 떨려요?

"시합에 나가 심장이 두근두근 떨릴 때는 컨디션이 안 좋거나 내가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을 때만 그래요. 겉으로도 드러나요. 표정이 굳어지고 말이 없고 날카로워져요. 제가 충분히 준비했으면 확신이 생겨요."

―동갑의 라이벌 아사다 마오 선수와 늘 비교되지요?

"주니어 선수로 같이 시작해서 시니어까지 같이 경쟁하는 경우가 드물어요. 처음에는 제가 뒤처져 있었는데, 같은 동양인에다 한국과 일본이니까 이겨야겠다고 오기가 생겼어요. 붙어보니까 할 만했고요."

―따로 연락도 주고받나요?

"깊이 얘기해본 적이 없고 시합 현장에서 만날 뿐이죠. 마오는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제게는 고마운 선수죠. 경쟁해왔기 때문에 서로 기량이 늘었어요. 마오가 없었으면 자극이나 동기부여가 없었겠죠."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아사다 마오를 꺾고 시상대에서 흘린 눈물은 잊을 수가 없어요.

"동계올림픽이 끝나면 내 선수생활은 끝이라고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금메달을 따고 한 달 뒤 '토리노 세계선수권대회'(2010년 3월)에 나가라는 거예요. 그전에 출전 약속은 되어 있었어요. 올림픽에서 원하는 목표를 이루고 난 뒤라 의욕도 없고 연습도 못하겠어요. 괜히 나갔다가 망신만 당할 수 있고."

―세계 최고의 여배우가 팬들에게 자신의 늙어가는 모습을 안 보이기 위해 은둔하고 싶은 심정 같은 것이겠지요.

"내가 죽어도 못하겠다고 난리를 쳤지만 어쨌든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토리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김연아 는 라이벌 아사다 마오 에 져 2위에 그쳤다.

―지난 4월 '모스크바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한 것도 힘든 결정이었겠군요.

"반년 이상 안 나가겠다고 싸웠죠. 주변에서 워낙 설득을 하니 어쩔 수 없었는데, 나가기로 해놓고도 후회하고 포기하고 싶었지요."

―설득당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주위에서 안 나가면 매스컴이나 팬들, 국민들이 저를 외면할 거라고 했어요. 아직도 전 그게 이해가 안 돼요. 왜 그러는지."

―그전까지 국민들의 사랑과 지지도는 100%였어요. 하지만 브라이언 오서 코치와의 결별 파문으로 사람들은 김 선수에 대해 다른 말도 하게 됐지요.

"참, 그런 일이 있었지요."

―우리 정서상 스승과 제자로 본 거죠. 잘 지내다가 해고를 해버린 것처럼 비쳤으니….

"그분과는 계약을 한 적도 없었어요. 그렇게 시끄러운 게 어이가 없었어요. 선수들은 코치를 바꿔요. 어느 선수나 다 그래요. 선수 측이 그런 결정을 하는 거예요. 올림픽도 끝났고 제게는 새로운 환경이 필요했던 거죠."

―오서 코치가 매스컴을 통해 그런 결정이 잘못된 것인 양 흘렸지요?

"그때 엄마를 욕하는 사람이 엄청 많았어요.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욕하고 엄마를 욕하니 기분이 안 좋았죠…. 사실 모스크바대회에 출전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있었어요. 그건 말할 수 없어요."

―독자들이 그 이유를 궁금해할 텐데.

"말할 수 없어요. 제 주위 사람은 알아요."

그의 주위를 취재해보니,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김연아 선수가 시합에 출전하고 현역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정부와 대한체육회 등의 요청 때문이었다.

― 모스크바 세계선수권에서는 안도 미키 선수에 밀려 준우승을 하고 울었지요.

"매스컴에서는 '2등을 해 억울해서 우네' 했는데 그건 100% 아니고. 복합적이었어요. 시합을 준비하면서 엄청나게 힘들었어요. 끝난 데 대한 홀가분함이 있었죠. 또 시상대에 섰을 때 '이제 다시는 이 자리에 설 수 없겠지' 하는 감회로 울컥했어요."

―공식대회 출전은 모스크바 세계선수권으로 끝이라는 뜻인데?

"다신…,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이었지요."

김연아는 이번 시즌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향후 일정에 대해서도 침묵해왔다.

―세상 사람들은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 한 번 더 나가라'고 원하지요. 어쩌면 김연아 선수 입장에서는 잔인한 요구라고 할 수 있겠군요.

"저는 밴쿠버 동계올림픽 출전을 기다리며 쭉 훈련해왔어요. 그걸 마쳤는데 또 4년을 기다리라고…. 여자 싱글 피겨 종목에서 올림픽 2연패는 카타리나 비트( 독일 ) 선수가 유일해요. 이 종목의 전성기는 18살~20대 초반이에요. 그 나이를 지나면 체력적으로 힘들어요."

―얼마 전까지 김연아 선수는 소녀였는데 이제는 숙녀로 보일 때가 있어요.

"몸이 점점 굳는 것 같아요. 피겨는 허리를 꺾고 난리를 피는데, 지난 모스크바대회를 준비할 때 처음에 굉장히 힘들었어요."

―김연아 선수는 '국민요정'이라고도 부르는데, 발도 예쁩니까?

"피겨선수들은 발가락뼈도 튀어나오고 굳은살이 잡히는데 저는 생각하는 것보다 괜찮아요(웃음). 고생을 전혀 안 한 발 같아요."

―김연아 선수 나이면 남자친구를 사귀어볼 때인데, 현실적으로 제약이 많죠?

"그렇죠."

―몇 년 전 박태환 선수와….

"싸이월드 일촌(一寸)에 글 한 번 썼더니, 네티즌들이 나서서 '사귀라'고 했어요. 솔직히 태환 오빠랑 행사에서 봤지 개인적으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요."

―그런 남자 친구라면?

"잘못 말했다 또 어떻게 뉴스를 장식할지."

―김연아 선수도 트위터를 하지요?

"공식적인 행사 활동을 알릴 때만 써요. 개인적으로는 하지 않아요. 별거 아닌 걸로 기사를 쓰고 하니까요. 가령 '오늘 점심을 못 먹었다'고 하면 '김연아 배고파' 하고 쫙 떠요. 내용도 없는 걸 갖고 그렇게 하면 질리잖아요. 저도 신경쓰이는 게 싫고."

―김연아 선수에게는 엄마만 있고 아버지의 존재는 안 보여요.

"엄마랑 같이 다니니까. 엄마는 신경쓰인다고 아빠가 경기장에도 못 오게 해요. 밴쿠버 올림픽 때는 오셨지만. 아빠를 두고 별의별 소문이 다 있다는 걸 들었어요."

―세계적인 선수가 되기까지 열심히 일해서 지원해준 아버지(중소업체 사장) 얘기도 해줘야 세상의 아버지들이 자부심을 가질 텐데.

"(웃음) 기자분들이 엄마 얘기만 물어보니까요."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남아공 더반에 다녀온 뒤 인천공항에서 기진맥진해 주저앉아 있는 모습에 마음이 안쓰러웠어요.

"더반이 생각보다 추웠어요. 프레젠테이션 전날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안 나오면 어떡하냐 걱정했어요. 할 때는 괜찮았는데 끝나고나니까 긴장이 풀려 한꺼번에 몸살이 왔어요. 국내로 들어오는 비행기에서 담요를 두 개나 덮었는데 덜덜 떨면서 잤어요. 방콕에 잠깐 쉬었다가 왔는데, 토할 것 같아 다음 비행기를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 약 먹고 그냥 탔는데 괜찮았어요.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다시 몸이 축 처졌어요. 괜히 안 좋은 모습을 보일지 몰라 기자회견에는 불참했어요. 주변에서 많이 걱정했는데 단순한 감기 몸살이었어요."

―또래 일반 여학생과 비교해 건강은?

"제가 선수이기 때문에 체력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더 안 좋을지 몰라요. 무릎 관절을 워낙 많이 써 닳고 닳았죠. 자잘한 통증은 늘 달고 살죠."

―스케이트화를 벗으면 무얼 해야겠다고 생각해봤나요?

"그걸 아직 잘 모르겠어요. 서둘러 결정해야 할 것도 아니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어요. 지금까지는 시합만 보고 달려왔고 그것만 빨리 끝나기를 바랐지, 그 뒤의 것까지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마음에 맞는 친구는 좀 있나요?

"자주 만나는 분들은 어른이 많아요. 대화 상대는 또래보다 나이 많은 분들이 잘 통하는 것 같아요."

꼭 30년 차이인 내가 말을 많이 했고, 그는 자주 웃음을 터뜨렸다.


 

         

 

김연아 선수는 "올림픽 금메달을 딴 뒤 선수생활은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시합이 기다렸다"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