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 ML 못 갈 뻔했다...스카우트 고백
[대니얼 김의 야!토크]
박찬호 ML 못 갈 뻔했다...스카우트 고백
[OSEN] 2011년 11월 27일(일)
작년 7월말.
50대 중반의 어느 한 중년 미국인 남성이 인천공항 입국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손에는 작은 여행가방과 서류가방이 전부였고
검정 재킷과 면바지 차림에 그 남성은 누가 봐도 출장 중인 미국 대기업 직원이었다.
그는 한국 야구의 큰 변화를 불어온 주인공이지만
정작 그를 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을 뿐 더러 그의 방한을 환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웬만한 야구 전문가가 아닌 이상 테리 레놀스란 이름은 생소하다.
그는 현 신시내티 레즈 스카우팅 부장이며
10년 넘게 LA 다저스 스카우트로 활약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렇다면 그와 한국야구는 어떤 관계일까?
그는 박찬호의 MLB 진출 과정에서 주연급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한마디로 박찬호를 발견하고 그를 꼭 LA다저스 유니폼을 입혀야 한다고
당시 다저스 프레드 클레어 단장과 피터 오말리 구단주를 설득한 주인공이다.
한번 상상해 보자.
만약 박찬호의 미국 진출이 없었다면
그의 뒤를 이은 한국선수들의 MLB 진출은 힘들지 않았을까?
애리조나의 핵 잠수함 김병현도…….
지금 클리블랜드에서 활약 중인 추신수도…….
테리 레놀스의 판단력과 추진력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 이다.
그럼 그는 20년 가까이 된 당시 상황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지난 1993년 그는 뉴욕주 버팔로에서 진행 중이던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스카우트하라는 지시를 받고
버팔로로 향했다고 한다.
한국 선수를 스카우트하라는 지시는 전혀 없었으며
그의 주 스카우트 대상은 한국 선수가 아닌 MLB 전력과 맞먹는 쿠바 대표 선수들이었다.
스케줄이 허락해 그는 홈플레이트 뒤에 자릴 잡고 별 기대 없이 한국 대표팀 경기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우연하게 마운드에 오르게 된 박찬호.
그날 테리 레놀스의 스피드건에 찍힌 박찬호의 첫 직구의 스피드는 97마일.
그 다음 직구는 1마일 더 빠른 98마일었다고 그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처음엔 스피드 건에 잘못 찍힌 줄 알았지.
근데 두 번째 직구가 98마일 나오길래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어”.
지금이야 핸드폰이 필수품이지만 당시 무명 스카우트는 삐삐로 만족해야 했다.
곧장 야구장 뒤편에 위치한 공중전화를 찾아 콜렉트콜로 본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어느 한 이름 모를 한국선수가 있는데 물건이라고 보고를 올렸다.
“ 나는 당시 한국야구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어.
88올림픽을 치렀던 곳이 한국이라는 게 전부였지”.
그는 경기장에 돌아와 경기를 끝까지 지켜본 후
호텔로 돌아가 곧장 스카우팅 리포트를 작성하였고 호텔 팩스로 단장에게 보고했다.
당시 한국에서 박찬호에 대한 평가는 시큰둥했다.
동기생들인 임선동, 조성민에 비해 한 수 아래 선수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놀스의 생각은 달랐다.
“ 내가 운이 좋았어.
그때 찬호를 볼 수 있었다는 게 나의 행운이었지.
당시 찬호의 직구 위력을 직접 봤어야 해.
한마디로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게 나와 구단의 행운이었지”.
그렇다면 계약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 일단 나는 찬호를 1라운드 지명급 선수라고 보고를 올렸어.
그 뜻이 뭔지 알겠어?
바로 계약금 100만 달러 이상은 투자할 가치가 있는 선수라는 뜻이지”.
당시 LA 다저스의 구단주는 피터 오말리였고 단장은 프레드 클레어였다.
이 두 인물은 한마디로 다저스의 총 책임자들로서 구단 내 주요 사항들을 결정하는 실세들이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들은 현장 스카우트들과 책임자들의 의견과 판단을 신뢰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한 오픈된 스카우팅 방침은 곧장 메이저리그에서 좋은 결과로 이어졌고
박찬호 계약 과정에서 또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레놀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실제로 박찬호뿐만 아니라
당시 LA 다저스는 4년 연속 신인왕을 배출해내는 최고의 육성시스템과 신인 발굴 능력을 자랑했다.
이렇게 박찬호의 첫 발걸음은 시작되었다.
한마디로 다저스와 레놀스의 운도 좋았지만
명문 구단의 러브콜을 받게 된 박찬호 또한 운이 좋았던 것이다.
박찬호의 미국 진출과 성공은 2가지의 중요한 요소들이 맞아 떨어진 결과라고 레놀스는 믿고 있었다.
“ 찬호는 정말 열심히 운동하는 노력파이기도 하지만 운도 정말 좋은 친구야.
당시 다저스의 구단주와 단장은 마음과 생각이 열려있는 분들이었고 모험도 할 줄 아는 분들이었지”.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모험은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
“ 당시 쉬쉬했던 부분들이고 그리고 지금 처음 말하는 거지만
당시 메디컬 테스트에서 안 좋은 결과가 나왔어.
계약이 마지막 과정에서 깨질 수 있을 만큼 안 좋은 소식이었지.
정확한 부위는 알려줄 수는 없지만…….
당시 의사의 판단은 지금 당장은 괜찮더라도 언젠가는 아주 큰 수술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거야.
최악의 시나리오는 내일 당장이라도 다칠 수 있다는 거야”.
100만 달러 이상의 계약금을 확보해 놓은 상태에서
갑자기 박찬호의 아메리칸 드림이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순간
구단주의 한마디가 모든 것을 원상복구시켰다고 레놀스는 회상했다.
“ 오말리 구단주에게 전체적인 상황을 보고 드렸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군.
‘그래? 그렇다면 100만 불 짜리 질문이네.
그렇다면 100만 불 한 번 줘 보고 어떤 답이 기다릴지 한 번 지켜보자고” .
그렇게 박찬호의 미국행은 성사되었고
메이저리그에서 100승 투수가 되는 데 성공한다.
2010년 여름 레놀가 한국에서 보낸 일정은 고작 3박4일.
그는 다저스를 떠난 지 오래 되었고 박찬호를 직접 본 지는 꽤 되었다고 한다.
강남 일대를 돌던 중 우연하게 지나게 된 어느 한 빌딩.
그 빌딩을 가리키며 저 빌딩의 주인이 박찬호라고 하니 그의 입가에서 작은 미소를 찾을 수 있었다.
“ 나중에 은퇴하고 나면 찬호가 나 저기 경비라도 시켜주겠지?”.
스카우트들의 세계는 그렇게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외롭고 힘든 직업이다.
언제 어디서 발견될지 모르는 '보물'을 찾기 위해 미국 전역을 그리고 때로는 세계를 돌아다녀야 한다.
그리고 레놀스는 18년 전 그랬던 것처럼 아직도 스피드건과 노트북을 들고 야구장으로 출근한다.
또 다른 박찬호를 꿈꾸며….
/대니얼 김
Daniel@dk98group.com
(전 뉴욕메츠 프런트, 전 김병현/서재응 미디어 코디네이터, 현 신시네티 레즈 스카우팅 코디네이터)
(twitter.com/daniekim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