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시진핑', 그는 누구인가?
시진핑 (習近平 | Xi Jinping)
시진핑 (習近平 | Xi Jinping) 정치인
- 출생 1953년 6월 1일 (중국)
- 나이 60세 (만59세)
- 성별 남성
- 별자리 쌍둥이자리
- 띠 뱀띠
- 소속 중국 (부주석),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 가족 아버지 시중쉰, 배우자 펑리위안, 동생 시위안핑
경력 청화대학대학원 법학 박사
1975 ~ 칭화대학교 화학 학사
시진핑, 제1인자에 오르기까지
신중한 언행과 폭넓은 인맥이 최대 무기
17기 1중전회서 리커창 제쳐
2010년 중앙군사위 부주석 겸임 `차기' 예약
시진핑(習近平)이
후진타오(胡錦濤)가 후계자로 밀던 리커창(李克强)을 제치고 중국의 1인자로 올라서기까지는
적을 만들지 않는 신중한 언행과 광범위한 인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시진핑은 혁명원로인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의 아들로, 태자당의 유력인사인데다
푸젠(福建)성 성장, 저장(浙江)성 서기, 상하이(上海)시 서기 등을 지냈지만
5년전에 열린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17차 당대회) 이전까지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다.
하지만 제17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17기 1중전회)를 마친후
새로 구성된 정치국 상무위원단이 처음으로 내외신 기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그가 리커창 보다 한단계 앞선 여섯번째로 등장,
유력한 차기 지도자라는 점을 시사하자 세계가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 리커창의 상무위원 진입은 확실시 됐으나
시진핑은 유력 후보로만 거론됐을 뿐더러
서열에서도 리커창을 앞설 것이라고 내다본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17차 당대회를 통해 후진타오 총서기의 자리를 물려받게 될 유력 후보자로 부상한데는
그와 젊은 시절부터 깊은 관계를 유지했던 쩡칭훙(曾慶紅) 당시 부주석과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지원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17차 당대회 당시 후진타오는 리커창을 자신의 후계자로 내세웠으나
이는 장쩌민측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고
대안을 모색하다 쩡칭훙이 제의한 시진핑 카드가 먹혀들었다.
당시 쩡칭훙은 후진타오에게
"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 인물." 이라는 점을 내세웠으며,
장쩌민도 이 카드를 수용했다.
여기에는 시진핑이 신중한 언행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태도 등을 통해 적지않은 신망을 쌓았던 데다
아버지 시중쉰과 쩡칭훙 등의 지원으로 광범위한 지지세력이 형성돼 있다는 점이 적지않은 힘이 됐다.
리커창 보다 한 발짝 앞선 시진핑은
여세를 몰아 당 산하 부서와 기구를 관장하는 중앙서기처 서기와 중앙당교 교장직을 확보,
당내 영향력을 키워갔다.
또 홍콩.마카오 업무 책임를 맡으며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차기 지도자로서 입지를 굳혀가던 시진핑은
2009년 9월 열린 제17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17기 4중전회)에서
중앙군사위 부주석 자리를 얻는데 실패했다.
이 과정에 후진타오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제기되면서
다시 리커창과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시진핑은 이듬해 10월 열린 17기 5중전회에서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선출됨으로써
확고한 후계자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됐다.
국가 부주석과 중앙군사위부주석을 겸임함으로써 차기를 `예약'한 시진핑은
여전히 신중하과 과묵한 언행을 지속하며 만일의 불상사가 생겨나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했다.
그는 올해초 미국 방문을 통해 대권가도로 향하는 마지막 시험대인 외교능력을 검증받았으며
권력교체가 이뤄지는 이번 18차 당대회에서 주석단 비서장을 맡아 의사진행을 이끄는 등
차기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시진핑은 15일 열리는 18기 1중전회에서 중국의 제1인자인 당 총서기로 공식 선출된다.
(베이징=연합뉴스) 신삼호 특파원 = ssh@yna.co.kr
'인간 시진핑', 그는 누구인가?
2012. 11. 06
'친한파'로 알려진 속 깊은 카리스마 정치인
'후덕재물'(厚德載物)
중국의 차기 10년을 이끌 제5세대 지도자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이 일생의 신조로 삼고 있다는 이 말은
자신이 나온 대학인 칭화대학교의 교훈이기도 하죠.
시진핑의 품성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는데요.
" 덕을 두텁게 하여 만물을 싣는다(포용한다)." 는 뜻을 가진 <주역>(周易) 문구입니다.
공식적 자리든, 사석이든 원래 과묵하고 자신을 잘 표현하지 않는다는 시진핑의 처세술 역시
이 '후덕재물'에서 나온 거랍니다.
그는 이 말과 함께
"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勿施於人)" 는 아버지 말을
평생 교조로 삼았답니다.
모두 덕(후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너무 후(厚)한 탓인지, 보통 중국의 지도자들은 인간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입니다.
그 유명한 " Where is 'She'? " ('시'진핑은 어디 갔나?) 사건에서처럼
차기 지도자가 2주일 간 사라져 세계 언론이 호들갑을 떨 대도
중국 당국은 어떤 공식 답변을 하지 않았었죠?
요즘 들어서야 혁명2세들의 싸움을 말리다 다친 걸로 나오고는 있으나, 이 역시 추측일 뿐입니다.
이처럼 베일에 가려진 시진핑.
그가 살아 온 역정을 사진들을 중심으로 구성하여 '인간 시진핑'에 대해 소개하려 합니다.
'친한파' 혹은 '지한파'
시진핑은 흔히 그렇게 불립니다.
그가 공식석상에서 '한국 축구'에 대해 부러움을 표시한 사실은 잘 알려졌죠.
주중 한국대사가
" 얼마 전에 한-중 프로축구팀 간 대결에서 중국 팀이 대승을 거둔 적도 있다." 고 하자,
시 부주석은 대뜸
" 그 당시 중국 팀은 광저우 헝다로, 한국인 이장수 감독이 있었을 때였죠." 라고 답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죠.
축구를 아주 좋아한다는 시진핑은 아마도 축구를 통해 한국의 일면에 대한 애정을 가진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 뿐아닙니다.
시진핑은 박준영 전라남도 지사와는 서로를 '라오펑요우(老朋友,오랜 친구)'라 부른답니다.
2005년 당시 저장(浙江)성 당 서기였던 시진핑은
자매결연을 맺고 있던 전남도의 박 지사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이후 8년 간 우정을 지키고 있다는 군요.
이 밖에 김하중 전 주중대사, 류우익 통일부 장관 등과도 교분이 두텁답니다.
이미 한국을 두 번 방문한 그가 늘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하면
주위에서 '4년 간격'이 적당하므로 내년(2013년)쯤이 좋겠다고 하여
" 그럼, 그렇게 하죠." 라 답했다니,
내년이면 서울에서 그를 볼 수 있을까요?
귀공자로 태어나 질곡의 삶으로...
시진핑은 1953년 6월 산시(陝西)성 푸핑(富平)현에서 태어났죠.
당시 부친 시중쉰(習仲勛,1913~2002)<아래사진>은
공산당 중앙선전부장을 거친 혁명원로였으니, 대단한 가문 출신인데요.
그 때문에 일명 '태자당'(太子黨) 출신이라 하죠.
그러나 그의 유복한 성장기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시진핑이 소학교에 입학하던 해 부친이 소설 '류즈단(劉志丹)' 사건에 휩쓸리면서 구속돼
(공산당을 반대한 연재 소설로 6만 여명이 연루, 6천여명이 숨지면서 문화대혁명의 발단이 된 사건)
이른바 사상개조가 필요한 반당 인사로 전락하면서 그와 함께 가족들까지 질곡의 길로 빠져들게 되죠.
오랜 구금과 조사를 받던 그의 아버지는 마침내 마오쩌둥(毛澤東)에게 편지를 쓰게 되고,
이 일로 마오쩌둥은 그를 자신의 가까운 곳에 구금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사실상은 마오의 보호 아래 있게 되어 차츰 명예회복의 길로 들어서게 된답니다.
'즈칭'(知靑,지식청년)이 되어
문화혁명기 시진핑은 마오쩌둥의 교시에 따라
당시 많은 지식청년(대학생)들처럼 칭화대학 화학공학과를 다니다 시골 농촌으로 하방(下放,샤팡)돼
7년 간 농촌 생활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즈칭파(知靑派)'라 부르는데요.
산시(陝西)성 옌촨(延川)현으로 간 시진핑은 농민들과 함게 기거하면서
농촌을 체험한 그는 당시를
" 매일같이 산으로 나가 작업을 해야 했다.
나는 제멋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나쁜 인상을 줬다." 라고 회고했답니다.
그러나 그 시기를 통해 시진핑은 인생에서 사회적 성숙을 이룹니다.
그는
" 내 숙소는 점차 그 지방의 중심인 마을 센터로 변해갔다.
매일 밤이 되면 노인과 젊은이들이 차례차례 찾아왔다.
문제가 생기면 대대의 당지부 서기도 점차 나와 상담을 시작했다." 고 말해
당시가 그의 인생에서 세상으로 발을 넓히는 시기였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적극적인 행동으로 분발한 시진핑의 존재는
윗사람들 눈에 띄게 되고, 영역이 넓어지면서 차츰 공산당 활동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푸젠(福建)성 공무원, 큰 꿈을 품다
크고 작은 공직활동을 하던 시진핑은
1985년6월 푸젠성 샤먼(厦門)시 부시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출세가도에 들어섭니다.
그 후 2002년까지 무려 17년여 동안 푸젠성의 여러 도시에서 그는 훌륭한 업적을 남기면서
관료로서 입지전적 성과를 남기게 되죠.
<젊은 관료시절의 시진핑>
'만민의 마음을 얻다'라는 평가를 받은 그가 당시 주로 남긴 치적들은
부패관리들에 대한 척결, 물가안정, 민생경제, 개방경제 도약과 같은 현안들이었는데요.
이 때가 바로 그의 정치행보에 한 획을 그은 시기입니다.
미녀가수 펑리위안(彭麗媛)을 만나
1986년 말 시진핑은
당시 지인의 소개로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던 군대의 여가수 펑리위안을 소개받게 됩니다.
시진핑보다 9살 어리고, 산둥(山東)성 시골의 보통 농가의 딸로 태어났지만,
하늘이 내린 목소리와 아름다운 얼굴을 지녀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문공단(文工團)에 속해 있던 펑리위안은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되죠.
시진핑을 처음 만나는 날 일부러 투박한 군용 바지를 입고 나갔다는 평리위안은
그가 외모보다는 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란 걸 확신했다죠.
그녀의 눈에 고위관료답지 않게 '촌티나고 나이 들어 보이는' 당시 시진핑은
세기의 미녀를 앞에 두고
" 노래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가 있나요? " 라는 첫 운을 뗐답니다.
당시 이미 잘 나가는 가수였던 그녀로서는
" 수입이 얼마나 되나" 와 같은 질문을 받았다면
시진핑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라고 회고하였다네요.
이심전심이 둘을 맺어 준 셈입니다.
'희망의 전야에서'(在希望的田野上)란 그녀의 노래는 중국 대륙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인데요.
때문에 간혹 부주석인 시진핑보다 더 유명한 아내라는 소릴 듣기도 한답니다.
누구보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시진핑은 지난 번 미국 방문때도 부부동반을 하지 않아 외신의 화제가 됐죠.
그는 평소 인민해방군 소장인 아내의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도 아내가 동반하는 것이 맞지 않다고 여기는
철저한 '내외유별주의자'로도 유명하답니다.
시진핑과 펑리위안은 슬하에는 딸이 한 명 있습니다.
대권가도에 들어서다
많은 정치평론가들은
" 겉은 부드럽고, 속은 엄격한 " 처세철학이
시진핑 자신을 13억 인민의 리더로 올라서게 한 힘이라고들 합니다.
푸젠성에서 관료로 성공한 그는
이후 저장(浙江)성 성장(省長), 저장성 당서기를 거쳐
2007년에 상하이시 당 서기,
그리고 마침내 2008년 대륙을 이끄는 9명의 리더그룹인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릅니다.
당시 많은 정치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후진타오 주석은 시진핑을 국가부주석 및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임명함으로써
당 주석 후임자로 내정되면서 대륙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새로운 시진핑의 시대는?
시진핑의 시대는 어떤 중국, 어떤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가 펼쳐질까요?
모든 이들이 그의 리더십에 기대를 걸고 있는데요.
아직은 중국 2인자의 특성 상
본격적인 전면 행보를 자제하면서 특유의 과묵함을 보이는
시진핑의 리더로서의 모습을 예측하기가 쉽진 않은데요.
그럼에도 외신들과 베이징의 정가 소식통들은
" 많은 것들이 바뀔 것." 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죠.
우선 시진핑은
고난의 삶을 이겨낸 태자당, 그리고 농민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즈칭파' 세대란 점을 놓고,
서민들을 위한 경제, 복지에 많은 정책수단을 투입할 거란 관측을 내놓고 있죠.
또한 동아시아 정세에 대해
현 중국체제에 비해선 유화적이고 대외 친화적인 외교를 펼칠 거라는 기대도 나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