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노조 창설자 마빈 밀러 간암으로 별세
ML노조 창설자 마빈 밀러 간암으로 별세
스포츠조선 | 노재형 | 2012. 11. 28
노조를 태동시키는 등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권익에 앞장섰던 마빈 밀러 전 메이저리그 노조위원장이 세상을 떠났다.
AP 등 외신은 28일(한국시각) '마빈 밀러가 오늘 오전 5시30분 뉴욕 맨하탄의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그의 딸 수잔 밀러가 밝혔다'고 보도했다. 향년 95세. 밀러는 지난 8월 간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해오다 3개월여만에 눈을 감았다.
메이저리그 선수노조 위원장인 마이클 웨이너는 이날 성명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선수들은 마빈에 대해 빚을 지고 있는 것이며 그의 영향력은 야구의 범주를 초월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마빈은 현대 스포츠 시대를 여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고, 그로 인해 모든 종목의 선수들, 구단주들, 팬들은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지난 66년부터 82년까지 16년 동안 메이저리그 선수노조 위원장으로 일하는 동안 마빈은 여러 부분에서 구단주들을 상대로 선수들의 권리 확장에 힘썼다. 68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노사단체협약 협상을 이끌었고, 70년 연봉조정제도, 75년 FA제도를 도입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구단주들의 횡포에 맞서 노조 파업을 이끌었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지난 72년 4월 13일간의 첫 노조파업을 주도했고, 76년에는 스프링캠프 기간 동안, 81년에는 7주간이나 구단주들에 대항해 선수들의 파업을 이끌었다. 메이저리그 선수노조 파업은 95년이 마지막이었으며, 올해까지 17년간 '평화' 상태가 유지돼 왔다.
페이 빈센트 전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는 "지난 50년간 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마빈이라고 생각한다. 야구 뿐만 아니라 스포츠 비즈니스 판도를 바꿨고, 야구선수들을 비롯해 모든 프로선수들 해방시켰다. 그가 나타나기전 선수들에게 권리란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선수들이 스포츠를 지배하고 있다"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메이저리그 전체 수입은 지난 67년 5000만달러에서 올시즌 75억달러로 45년간 150배나 성장했고, 당시 6000달러였던 선수평균연봉은 올해 48만달러로 80배가 늘어났다. 밀러는 노조위원장에서 물러난 뒤 선수노조 고문으로 일을 해왔다.
노재형 기자 jhno@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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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의 아버지' 마빈 밀러, 95세로 사망
조이뉴스24 | 2012. 11. 28
메이저리그 역사의 큰 별이 떨어졌다.
메이저리그 노사관계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마빈 밀러 전 선수노조 위원장이 28일(한국시간) 간암으로사망했다. 향년 95세.
밀러는 자유계약(FA) 제도의 창시자다. 지난 1975년 오랜 투쟁 끝에 메이저리그에서 6년을 뛴 선수는 어떤 구단과도 자유롭게 계약할 수 있다는 조항을 노사협약에 삽입했다. 이후 선수들의 지위는 몰라보게 상승했다. 이전까지 평생 한 구단에 보유권이 묶여 있던 선수들은 자유롭게 여러 구단과 협상을 시작했고, 수많은 백만장자가 배출됐다.
1917년 양키스타디움이 위치한 뉴욕 브롱스에서 태어난 밀러는 한 평생 직업노동운동가로 활동했다. 군무원 노조, 기계 노조, 자동차 노조, 철강 노조 등에서 활동가로 재직한 그는 1966년 메이저리그 선수노조 위원장으로 야구계에 발을 내딛었다.
지리멸렬했던 선수들을 규합해 1968년 구단과 첫 단체협약을 이루어낸 그는 2년 뒤 연봉조정 제도를 도입했고, 1974년 앤디 매서스미스와 데이브 맥넬리를 1년간 무보수로 뛰게 한 뒤 메이저리그 중재위원회에 제소, FA 제도의 산파 역할을 했다.
그는 너무 많은 FA는 오히려 선수들의 시장 가치를 떨어뜨린단고 판단, 6시즌을 뛴 선수에게만 FA 자격을 주도록 제안해 관철시켰다. 현재 메이저리그 FA 제도의 초석을 닦아놓은 것이다. 그가 노조위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야구선수들의 평균연봉은 1만9천달러에서 32만6천달러로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밀러는 구단을 압박하기 위해 실력행사도 불사했다. 1972년 모두 13일에 걸쳐 첫 파업을 실시하는 등 재임 기간 모두 3차례의 파업을 주도했고, 2차례의 직장폐쇄도 경험했다. 선수노조 파업은 95년이 마지막이었으며, 올해까지 17년간 평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1982년을 끝으로 야구계를 떠난 밀러는 여러차례 명예의 전당 헌액 후보로 이름이 올랐지만 번번이 고배를 들었다. 구단주들 입장에선 '눈엣가시'였던 탓에 좀처럼 쿠퍼스타운의 관문을 넘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야구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은 베이브 루스, 재키 로빈슨의 그것과 동급으로 평가되고 있다.
페이 빈센트 전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는 AP통신을 통해 "밀러는 지난 50년간 가장 야구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며 "그는 스포츠 비즈니스를 영구히 바꿔놓았다. 진정 프로선수들을 (구단의 멍에에서) 해방시켰다. 과거 아무런 권리도 없었던 선수들은 지금 야구라는 스포츠를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LA 다저스의 좌완 투수 크리스 카푸아노 또한 "현대 프로선수들은 모두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며 "우리가 경기의 지배자로서 권리를 얻을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그 덕분"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조이뉴스24> [김형태기자]
MLB 선수노조의 신화 마빈 밀러
1966년 4월15일.
이날은 메이저리그(MLB)의 역사가 새로 쓰이기 시작한 날입니다. 메이저리그 선수노조(MLBPA)의 투표 결과 489대136의 압도적인 표차로 마빈 밀러가 새 노조위원장에 당선된 것입니다.
1954년 퇴직연금제도에 불만을 터뜨리며 MLBPA가 결성됐지만 그들의 힘은 미미했습니다. 여전히 구단주들이 리그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선수노조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밀러가 노조위원장에 선출되고 16년간 노조를 이끄는 동안 MLB는 완전히 변신했습니다. 백발에 콧수염을 기르고 잔잔한 미소와 함께 늘 조용한 말투의 밀러는 얼핏 내성적인 젠틀맨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선수들의 권리를 위해서 싸울 때는 그 어떤 정치가보다 협상에 탁월했고 그 어떤 맹수보다 용맹했으며 선수들의 의지를 하나로 모으는 탁월한 리더였습니다.
밀러는 야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스트라이크(strike)'라는 용어가 전혀 다른 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인물이라는 평을 받습니다. 그가 노조를 이끄는 동안에 세 번의 스트라이크(파업)가 있었고 직장폐쇄도 두 차례 겪었습니다. 1972년 4월5일 모든 메이저리그 구장에는 '오늘 경기 없음' 사인이 붙었습니다. 13일간 진행된 최초의 선수 파업이었습니다. 1976년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중에도 두 번째 파업이 있었고, 1981년 시즌 중반에 일어난 스트라이크는 7주나 계속되기도 했습니다.
구단주 입장에서 보면 눈엣 가시 같은 존재였지만 선수와 야구를 위해 그가 기여한 바는 20세기 후반기의 MLB는 물론 미국 스포츠를 완전히 개혁시켰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밀러는 1968년 프로 스포츠 사상 최초로 단체교섭l(collective bargaining)을 성사시켜 구단주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냈습니다. 이 단체교섭에서 선수 최저 연봉이 20년 만에 처음 인상되기도 했습니다. 1970년에는 선수의 조정신청자격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가 이끌어낸 가장 큰 변혁은 바로 자유계약선수(Free Agent) 제도였습니다. 거의 100년간 지속되던, 구단에서 선수의 거취를 임의대로 결정하는 '보류 조항(reserve clause)'이 독과점금지법(antitrust) 위반이며, MLB도 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법정싸움을 통해 쟁취했습니다. 물론 경제학자로서 FA가 양산되면 궁극적으로는 선수 연봉이 추락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감지한 밀러는 MLB에서 6년 이상을 뛰어야 FA가 된다는 조건에 못이기는 척 동의하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가 노조 위원장을 맡은 기간 동안에 MLB 선수의 평균 연봉은 500%가 인상돼 같은 기간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률보다 3배 이상이 높았습니다. 그가 처음 노조를 맡았을 때 MLB 선수의 최저 연봉은 6000 달러였는데 1982년 밀러의 위원장 마지막 해 최저연봉은 3만3500 달러가 됐습니다. 그리고 올해 MLB 최저 연봉은 48만 달러입니다.
뉴욕 대학 등에서 노동경제학을 전공한 밀러는 미국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철강노조와 자동차 노조 등에서 노동경제학자이자 협상가로 일하면서 그 계통으로 잔뼈가 굵었습니다. 탁월한 협상가로 이름을 떨치면서 1966년 MLB 노조위원장 추천을 받았지만 처음엔 구단주의 반대가 거셌습니다. 그는 스프링 캠프를 돌면서 선수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다녔는데 구단의 입김을 받은 일부 코칭스태프의 거센 반발과 방해공작도 있었습니다. 일부 구단 선수들은 밀러의 노조위원장 반대 의사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밀러는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노조위원장이 되면서 MLB의 역사를 새로 쓰는 주도적인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구단주들의 방해와 음해 공작이 오히려 선수들의 밀러에 대한 믿음을 굳혀 주었으니 아이러니였습니다.
그렇게 MLB 노사관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밀러가 28일 향년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소 놀라운 것은 고인에 대한 평가입니다. 선수나 노조 측에서는 당연히 밀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겠지만, 전 커미셔너나 MLB 야구계 전체가 마빈 밀러의 역사적인 역할에 대해 대단히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현 노조위원장인 마이클 와이너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선수들은 마빈과 그가 야구에 끼친 시공을 초월한 업적에 감사해야 한다. 그는 현대스포츠의 선구자였으며 선수와 구단주와 그리고 모든 팬들에게 엄청난 혜택을 가져다준 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전 커미셔너 페이 빈센트는 "마빈 밀러는 지난 50년간 야구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스포츠뿐 아니라 스포츠 비즈니스 자체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으며 특히 야구 선수를, 아니 모든 프로스포츠 선수를 해방시킨 인물이다. 그가 나타나기 이전에는 선수의 권리라는 것이 사실상 거의 없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버드 셀릭 현 커미셔너는 "마빈 밀러는 뛰어난 행정가였고 야구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그는 야구가 오늘날의 위상을 이루는데 특별한 영향을 끼쳤으며 지난 50여 년간 MLB 선수는 그의 공헌에 큰 혜택을 입었다."라고 말했습니다.
1967년 MLB의 수익은 5000만 달러였습니다. 올해 MLB의 수익은 75억 달러입니다. 우리 돈으로 약 8조2000억 원의 수익을 올리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데는 마빈 밀러의 개혁적인 마인드와 추진력이 큰 역할을 했다고 미국 야구는 자평하고 있습니다. FA 제도라는 것이 처음에는 MLB를 망하게 할 것이라는 비난과 비관론도 있었지만 결국은 그것이 상생의 길이 됐습니다. 선수의 위상이 높아지면 경쟁력은 더욱 치열해졌고, 뛰어난 기량을 펼쳐 더 나은 대우를 받으려는 노력도 배가됐습니다. 파업과 직장폐쇄 등의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결국 구단과 사무국과 선수노조는 협심해서 야구의 발전을 이끌어가는 힘찬 동력으로 뭉쳤습니다.
마빈 밀러는 지난 4월 최초의 MLB 스트라이크 40주년을 맞아 뉴욕대 법대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FA 제도와 팬의 지속적인 큰 관심과 성원은 MLB의 발전과 수익 증대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라며 "내 삶에서 이렇게 제대로 된 '윈-윈'의 상황을 본 적이 없다. MLB는 수익과 연봉, 각종 혜택 등에서 계속해서 신기록을 써내려가고 있다. 당시 상황에서는 모두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가능케 했으며 노사가 모두 승리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MLB 사상 가장 큰 변혁을 이룬 인물인 마빈 밀러가 아직도 명예의 전당 멤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두 번의 특별위원회 투표에서 밀러는 간발의 차로 필요한 득표를 하지 못했습니다. 피터 유베로스 전 커미셔너는 "그는 야구라는 게임을 바꾸어 놓은 인물이다. 그는 늘 강성이었지만 또한 궁극적으로는 아주 공정한 인물이었다. 밀러의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자격에 대해서는 논할 가치조차 없다."라며 아쉬움을 나타냈습니다. 밀러 자신도 생전에 "명예의 전당은 나를 제외시킴으로서 나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라는 자조적인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2013년 투표에서는 보나마나 마빈 밀러가 명예의 전당 멤버로 선출될 것입니다. 늘 뒷북을 치는 명예의 전당이라는 빈축을 면할 수 없겠지만 고인은 그런 사실은 아랑곳 하지 않을 겁니다. 그가 사랑한 것은 야구였고 선수였지, 명예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