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 “오늘의 높은 벽, 10년 뒤엔 열린 문으로”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
“오늘의 높은 벽, 10년 뒤엔 열린 문으로”
다문화 국회의원 1호 이자스민 - 탈북 한의사 1호 김지은씨 ‘희망 토크’
동아일보 2013. 04. 02
1995년과 2002년 각자 고향을 떠나 이 땅에 첫발을 들였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
필리핀 새댁',말투가 낯선 '북한에서 온 여자'로 불렸다.
세월이 흘렀다.
한국생활 18년 차와 11년 차.
이젠 이름만 말해도 알아보는 이가 많다.
다문화 국회의원 1호인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36)과
남북한 한의사 1호인 김지은 진한의원 원장(47).
두 사람이 동아일보 창간 93주년 기획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에 선정됐다.
추천위원들은
다문화 인구 130만 명, 새터민 2만5000명 시대에 두 사람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본보 선정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을 소개합니다.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과 김지은 진한의원 원장(뒷줄 오른쪽)은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에 나란히 선정된 것을 계기로
소수자가 맘 편히 살 수 있는 한국 사회를 만들자고 다짐했다.
함께 만난 지구촌어린이집 아이들의 밝은 웃음이 두 사람의 의지를 더욱 굳게 하는 듯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소수자로 한국 사회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던 이 의원과 김 원장.
지난달 21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
○ 난 한국 아줌마인데, 보는 눈길은…
이 의원은 올해부터 필리핀 생활보다 한국 거주 기간이 더 길어졌다.
학원(사교육) 문화는 안 따라가겠다고 다짐했지만
학교 임원을 하면 1점 더 준다는 얘기에 귀가 솔깃해지는 한국 엄마.
김 원장도 마찬가지다.
" 이젠 북한에서 쓰는 단어를 들으면 어디서 듣긴 들었는데 하는, 그런 느낌이 나요."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생각해 움찔할 때가 가끔 있다.
이렇게 만드는 건 같은 한국 사람들이다.
이 의원은 2010년 사고로 남편과 사별한 직후
" 언제 돌아가느냐? " 는 말을 주위 사람들에게서 들었다.
충격이었다.
" 15년의 내 인생이 다 여기에 있는데,
내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난 한국 사람인데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느냐고 따지고 싶었는데 서러워만 할 뿐 말도 못했어요."
김 원장이 맞장구친다.
북한에서 이혼했다고 밝히면
" 에이, 거짓말." 이라는 반응이 되돌아왔다.
북한에선 그럴 수가 없다는 식이다.
살아 보지도 않은 이들이 이렇게 나오면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다.
쉽지는 않지만 북한에도 이혼은 있다.
" 제가 기쁨조를 하다가 밀려나서 도망쳐 온 것 같아요?
이런 대답을 원하는 건가…."
차분하던 김 원장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의원은 국회의원으로 유명해졌는데도 시선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고 고개를 젓는다.
얼마 전 축사 요청을 받아 행사에 참석했는데
주최 측 인사들이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자신을 좋지 않게 얘기하더란다.
한국어를 못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 자리까지 올려놓고 한국말도 못 할까 봐.
열이 나서 '한국말, 필리핀말, 영어 다 해요.
뭘로 할까요?
스페인어도 합니다'라고 쏘아붙였어요."
이 의원은 국회의원 대접도 받지 못하는 편이다.
" 권력을 지닌 사람들한테는 공손하게 '안녕하세요' 하잖아요.
하지만 저를 처음 봤을 때는 등이 의자 등받이에서 떨어지지 않아요.
얘기를 오래 해야 점점 허리가 숙여지죠."
이 의원은 이런 고정관념을 깨려면 사람을 많이 만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행사라는 행사는 다 다닌다.
▼ " 다문화 2세들 위해… 공존 한국의 꿈, 결코 포기 못해요" ▼
■ 이자스민 의원-김지은 원장 희망 토크
○ 가급적 허리를 더 숙여야
요즘은 초등학생도 다문화라는 말을 안다.
한국 사회의 외연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도 한다.
하지만 아직은 거기까지다.
이 의원은 4대가 함께 사는 집의 며느리다.
이를 보고 옆집 아주머니가
" 요즘엔 외국 며느리가 좋아.
애들한테 이중언어를 가르치고, 시부모도 잘 모시잖아." 라고 말했다.
이 의원이 농담 삼아 물었다.
" 막내아들 배필로 어느 나라 아가씨 소개해 드릴까요.
말씀만 하세요."
칭찬 일색이던 아주머니는 이내
" 아휴, 아니야.
내 아들은 한국 여자와 결혼시킬 거야." 라며 손사래를 쳤다.
남은 몰라도 나는 안 된다?
이 의원이 절감한 한국 다문화의 현주소였다.
두 사람은 결혼이주여성과 새터민 사이에서 '희망 아이콘'이 됐지만
뜻밖의 상처를 줄까 봐 오히려 몸가짐을 더 조심스럽게 할 때가 적지 않다.
이 의원은 방송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한 적이 있다.
당시 어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촬영장에 끌고 와서는
" 봐, 너랑 같은 필리핀 사람인데 이 언니는 한국말 잘하잖아." 라고 꾸짖더란다.
이 일로 이 의원은 다문화 여성에 대한 낮은 기대치를 높이는 자신이 비교 잣대로 바뀌면서
동료 이주 여성에게 더 큰 스트레스를 주지나 않을까 늘 돌아보게 됐다.
김 원장은 북한 청진의대를 졸업하고 8년간 한의사로 일했다.
한국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결국 한의대 정규 과정을 다시 밟아 2009년 자격증을 땄다.
정말 어렵게 이뤄 낸 성취였지만 새터민 앞에선 잘 밝히지 않는다.
" 모든 새터민이 꿈을 갖고 한국에 와요.
그들이 얼마나 피땀 흘리며 애쓰는지 아는데 '내가 노력해서 이만큼 됐어'라고 감히 말 못 해요."
○ 우리가 만드는 10년 뒤 희망
두 사람은 편견과 공격에 한국을 떠나고 싶은 순간이 없지 않았다.
유서를 쓴 적까지 있다.
두 사람은 그런 순간 되레 한국을 끌어안았다.
김 원장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 한국에서 가장 낯선 게 명함 문화였어요.
언제 식사 한번 하자는데 연락이 안 오더라고요.
처음엔 새터민이라고 무시하나 싶었는데 그렇게만 생각하면 한국 사람과 멀어지잖아요."
그는 하루에 받은 명함을 죽 펼쳐 놓고 먼저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오늘 고마운 자리였다. 많이 배웠다'라고. 또 사람을 만날 때면 항상 웃었다.
그랬더니 무척 편하게들 생각하는 것을 느꼈다.
그 덕분에 지금은 부르면 와르르 쏟아져 나올 만큼 친구가 많아졌다.
이 의원에게는 필리핀의 여유와 낙천성이 보탬이 됐다.
" 점심때, 한국 시어머니와 필리핀 엄마가 냉장고 문을 동시에 연다고 해 보세요.
아무것도 없으면 시어머니는 어떡하느냐면서 걱정해요.
친정 엄마는 점심을 제치고 저녁을 먹자고 하죠."
이 의원은 지난해 외국인은 떠나라는 공격을 받고도 꿋꿋했던 친정 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두 사람은 아직 할 일이 더 많다고 강조한다.
자신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10년 뒤 다문화가정이나 새터민을 보는 눈이 달라질 테니까.
무엇보다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의 설움을 아이들까지 겪게 하고 싶지 않다.
희망은 없지 않다.
이 의원의 아들 승근 군(17)이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 역시 다문화가정 애들이 다 예쁘고 잘생겼어.
나도 외국인과 결혼해야지, 2세를 위해서."
다문화가정 행사에 다녀온 뒤의 소감이었다.
승근 군은
혼혈이 예쁘니까 앞으로 방송에 나오는 연예인들은 대부분 다문화가정에서 나올 것이라고도 했다.
이 의원은 그런 아들에게
" 이미 섞여 있어." 라고 말해 줬다.
김 원장은 2년 전 탈북한 아들 혁진 씨(21)와 14년 만에 재회했다.
아들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민족은 백의민족인데 어떻게 외국인과 함께 사느냐고 생각했다.
지금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나중에 아들이 결혼한다고 할 때 누굴 데려오든지 모든 조건을 갖출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10년 뒤 한국 사회가 함께 사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 혁진이가 살 사회는 경쟁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꼴찌에게도 박수쳐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남매를 둔 이 의원이 맞장구친다.
" 치열하게 경쟁하다 밟히는 한이 있더라도 과정에서는 똑같이 경쟁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죠."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