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레전드] 손과 발로 신(神)이 된 사나이, 마라도나
[WC레전드]
손과 발로 신(神)이 된 사나이, 마라도나
풋볼리스트 2014. 05. 26
[풋볼리스트]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스타가 없다면, 축구의 재미는 반감될 것이다.
축구의 흐름이라는 도도한 물결을 이끌어가는 선구자들이 있었기에
많은 이들이 공 하나에 웃고 울 수 있었다.
'풋볼리스트'가 지난 월드컵 무대를 뜨겁게 달궜던 영웅들을 소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곧 개막하는 '2014년 브라질월드컵'을 더 완벽하게 즐길 수 있다. < 편집자주 >
축구의 신(神), 디에고 마라도나(54).
실제로 그를 숭배하는 '마라도나교'라는 종교가 존재할 만큼,
마라도나는 전 세게 축구 팬, 특히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는 인물이다.
마라도나가 '신'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데에는,
1986 멕시코월드컵 8강전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나온 '신의 손'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당시 마라도나는 0-0으로 접전을 벌이던 후반전 6분
페널티라인 오른쪽에서 올라온 공을 머리가 아닌 왼손으로 밀어 넣으며 선제골을 넣었다.
느린 화면으로 보면 명확하게 볼 수 있는 이 장면을 심판진은 인지하지 못했다.
기세를 올린 마라도나는 4분 후 잉글랜드 수비수 6명과 골키퍼까지 제치고 추가골을 넣었다.
당시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대륙 동남단의 포클랜드 영유권을 다고 다투던 상황이었다.
양 국간의 외교 관계도 무척 껄끄러웠다.
약자에 속했던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이 경기를 통해 마라도나를 '신의 손'이라 부르며 영웅으로 대접했다.
반면 그는 잉글랜드 국민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 됐다.
비단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마라도나는 월드컵의 영웅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1982년부터 1994년까지 4회 연속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월드컵에서만 21경기 연속 출전해 8골 8도움을 기록했다.
1986년과 1990년 두 대회 연속 결승에 진출했다.
특히 신의 손 사건이 나온 멕시코 대회에서는 5골 5도움을 올리며 최우수선수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 외에도 A매치 91경기에 출전해 34골을 넣은 살아 있는 전설이다.
마라도나의 이름은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만 빛난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의 진가를 클럽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했다.
16세였던 1976년 아르헨티노스주니오스에서 데뷔해 5시즌 동안 166경기에서 116골을 넣었다.
이후 보카주니어스를 거쳐 1982년 FC바르셀로나에 입단했다.
유럽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1983년 9월 경기 도중 왼쪽 발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회복 후 기대에 못 미치는 활약으로 대중의 비판을 받으면서, 마라도나는 코카인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1984년 5월에는 아틀레틱빌바오와의 코파델레이 결승전에서 집단 난투극을 주도했고,
결국 두 시즌 만에 바르셀로나를 떠나게 됐다.
마라도나가 선택한 곳은 이탈리아세리에A의 나폴리였다.
당시 나폴리는 리그에서 우승 한 번 못해본 평범한 팀이었다.
하지만 마라도나의 입성과 함께 황금기를 맞았다.
그가 뛴 7시즌 동안 나폴리는 2번의 리그 우승과 한 번의 유럽축구연맹(UEFA)컵을 차지했다.
마라도나는 259경기에 출전해 115골을 넣으며 나폴리의 영웅이 됐다.
당시 세리에A가 유럽 최고 수준의 프로축구리그였던 것을 감안하면
마라도나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마라도나는 감독이 되어 월드컵 무대를 다시 한 번 밟았다.
남아공으로 가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자신과 호흡이 맞지 않는 선수들은 명단에서 제외하기 일쑤였고,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
감독의 기본적인 자질을 의심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만약 마라도나가 아닌 다른 감독이 그와 같이 행동했다면,
그토록 오랜 시간 감독직을 보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아르헨티나를 이끌고 본선에 나섰고 8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독일에 0-4로 대패했고, 감독으로 치른 마지막 경기에서 자존심을 구기며 쓸쓸하게 퇴장했다.
글= 정다워 기자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WC레전드]
펠레의 유일한 라이벌, 마라도나
포포투윤진만 2014. 05. 20
[포포투 플러스] 올 여름 '축구의 나라' 브라질에서는 열아홉 번째 축구의 역사가 쓰일 예정이다.
새로운 주인공이 추가되기 전에 월드컵 위인전의 앞 챕터들을 우선 훑어봐야 한다.
걱정 마시라.
월드 No.1 풋볼 매거진 <포포투>가 여러분 대신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혔다.
과거 월드컵을 찬란하게 빛냈던 레전드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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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코너의 주인공은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이단아 디에고 마라도나(Diego Maradona)다.
약물 파동, 섹스 비디오, 총기 난사 등 기행을 일삼았던 악동,
그러나 팀 동료들조차 따라 잡을 수 없었던 완벽한 드리블러는 마라도나가 현역 시절 지녔던 두 얼굴이다.
월드컵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과 논란의 골을 동시에 만들기도 했다.
월드컵을 자신의 독무대로 만든 천재이자 월드컵 역사를 새로 쓴 마라도나를 소개한다.
Maradona is...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를 논할 때 펠레와 함께 반드시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다.
펠레보다 한 세대 늦게 전성기를 누벼 직접적인 비교가 불가하지만
1986멕시코월드컵에서 보여준 활약을 잊지 못하는 이들에겐 언제가 최고 또는 전설로 불린다.
1960년 악명 높은 빈촌에서 태어난 마라도나는
가린샤, 펠레, 리오넬 메시와 마찬가지로 길거리에서 공을 차는 빈민촌의 '피베(소년, 신동)'였다.
작은 키로도 나이 많은 선수들을 농락하는 천부적 재능으로
15세가 되기도 전에 마라도나는 이미 자기 이름을 아르헨티나 전국에 알렸다.
지역팀 아르헨티나 주니어스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마라도나는
그 실력을 인정받아 17세의 나이로 성인 국가대표팀에도 발탁되어 헝가리전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아우토반을 달리는 스포츠카처럼 거칠 것이 없었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나버린 스포츠 같았다.
마라도나는 1982년부터 1994년까지 월드컵 4개 대회에 연속으로 출전했다.
첫 번째 출전이었던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상대의 거친 대인마크에 시달린 끝에 무득점에 그쳤다.
하지만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혼자 힘으로 조국 아르헨티나에 두 번째 우승을 안겼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결승전에서 독일에 승부차기로 패하며 아쉬운 준우승을 거뒀다.
나폴리에서의 활약을 묶어 유럽에서 그는 '역대급' 슈퍼스타로 추앙받는다.
선수 말년과 은퇴 후 약물 중독 및 각종 기행으로 스스로 명성을 깎아 먹었지만,
현역 시절 보여줬던 신묘한 테크닉은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Maradona in FIFA World Cup
마라도나는 A매치 데뷔 후 1년 뒤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 출전을 갈구했다.
1960년대 라이벌 브라질의 성공에 배 아파하던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아르헨티나가 월드컵을 들어 올리기 위해선 축구 신동이 반드시 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부 독재까지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나 체사르 메노티 당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감독은 단호했다.
" 마라도나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압박을 견딜 수 없을 것." 이라며 월드컵 엔트리에서 그를 제외했다.
마라도나는 TV 방송에 출연해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1년 뒤 마라도나는
일본에서 개최된 청소년월드컵에서 화풀이라도 하듯이 맹활약하며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4년 뒤 기회가 찾아왔다.
마라도나는 더 이상 어린 울보가 아니었다.
아르헨티나 리그 최고의 슈퍼스타로 성장해있었다.
나이도 22세로 책임감을 가질 나이였다.
아르헨티나는 그런 마라도나에게 에이스의 상징인 '10번'을 맡겼다.
그러나 월드컵 첫 출전에서 마라도나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며 실망을 안겼다.
브라질전에서는 상대 선수의 복부를 발로 걷어차 퇴장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선 완벽히 기대에 부응했다.
바르셀로나와 나폴리를 거치면서 유럽 무대를 경험한 마라도나는
지난 대회보다 힘과 스피드, 드리블 기술 등 모든 면에서 발전해 있었다.
그는 총 5골 5도움이라는 괴력으로 조국에 역사상 두 번째 월드컵 우승을 안겼다.
마라도나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과 1994년 미국 월드컵에도 출전했다.
이탈리아 월드컵에선 노련한 플레이로 준우승을 이끄는 진가를 발휘했지만,
미국월드컵에선 약물 파동으로 대회 도중 퇴출당하는 불명예를 썼다.
Maradona's Moment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은 마라도나의 '원맨' 월드컵이었다.
조별리그 한국전(3-1승), 불가리아전(2-0승)에서 모든 골에 기여하며 조국에 16강 티켓을 안긴 마라도나는
우루과이를 상대한 16강전에서도 맹활약하며 1-0 승리를 이끌었다.
8강전 잉글랜드전에서 그는 진가를 드러냈다.
후반 6분 상대 진영에서 팀 동료 호르헤 발다노에게 패스한 뒤 문전을 향해 빠르게 침투했다.
발다노가 패스한 공이 상대 수비수 발에 맞고 떠오르자 마라도나는 높이 뛰어올랐다.
자기보다 키가 20츠나 더 큰 피터 실튼(GK)와의 공중 볼 맞대결에서 이겨 결정적인 헤딩골을 낚았다.
실튼을 비롯한 잉글랜드 선수들은 주심에 강력히 항의했다.
마라도나가 손을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심은 그대로 마라도나의 득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해당 장면은 수많은 사진 기자들의 카메라를 속이진 못했다.
경기 후 마라도나의 머리 위로 뻗은 손과 볼이 정확히 닿은 장면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경기 후 마라도나마저
" 나의 머리와 '신의 손'이 함께 만든 골." 이라는 기상천외한 해명을 내놓았다.
훗날 잉글랜드전 득점이 '신의 손(hand of god)'으로 명명된 배경이다.
그러나 그 경기에서 마라도나는 '신의 손' 해프닝을 깨끗이 지워버리는 슈퍼 플레이를 펼쳤다.
헤딩 득점으로부터 불과 3분 뒤 마라도나는
하프라인부터 출발해 60미터 거리를 혼자 드리블해 들어간 끝에 골키퍼까지 제치고 추가골을 뽑아냈다.
한 경기에서 월드컵 역사상 가장 논란이 된 골과 가장 위대한 골을 마라도나 혼자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아르헨티나는 이 대회 결승에서 서독(West Germany)을 물리치고 우승했다.
대회 MVP는 당연히 마라도나의 차지였다.
Maradona after the World Cup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참가한 마라도나는
도핑 테스트에서 신경흥분제인 에페드린 양성 반응이 나와 대회 도중 퇴출당하였다.
그는 트레이너가 건넨 스포츠음료를 섭취한 것뿐이라고 항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강에서 조기 탈락한 아르헨티나 대표팀보다도 먼저 마라도나는 미국을 떠나야 했다.
대회 출전 전부터 그는 이미 약물 중독 상태였다.
나폴리 소속이던 1991년 3월 도핑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와 15개월 출전 정지를 받은 바 있다.
1997년 보카주니어스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더는 선수로 뛸 수 없었다.
그리곤 1997년 현역 은퇴했다.
마라도나는 은퇴 후 코카인 흡입, 섹스 비디오 사건, 총기 난사, 공항 직원 폭행 등 기행을 일삼았다.
현역 시절 70kg였던 몸무게는 100kg을 웃돌았다.
생명이 위독하다는 의사의 소견까지 나올 정도였다.
오랜 치료 끝에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신으로 모시는 종교까지 있듯이
아르헨티나 국내에서 마라도나는 여전히 절대적 영웅으로 통했다.
지도자 경험이나 능력 검증은 의미가 없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게 된 마라도나를 향해
자국민은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리오넬 메시를 보유하고도 8강에서 탈락했지만 아르헨티나 국민은 마라도나에게 박수를 쳤다.
월드컵 후 2011년에는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알와슬 감독을 역임했지만
감독으로는 지금까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마라도나는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모든 이로부터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아름다운 플레이의 극치와 월드컵 우승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던,
흔치 않은 슈퍼스타였기 때문이다.
글=윤진만, 사진=Gettyimages/멀티비츠, 포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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