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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레전드] 바로 그 이름 ‘축구황제’ 펠레

leekejh 2014. 5. 26. 22:18

 

       [WC레전드]

 

                바로 그 이름 ‘축구황제’ 펠레

 

 

                                                                                                   포포투|배진경| 2014. 04. 12

 

 

[포포투 플러스]

 

우리는 인물을 통해 역사와 처음 만난다.

어린 자식에게 부모는 고리타분한 역사책보다 위인전을 먼저 사주기 마련이니까.

인류 축구의 역사는 FIFA 월드컵 대회의 전통과 역사와 같은 흐름을 탄다.

월드컵 레전드가 바로 축구사의 영웅이자 위인이다.

그들을 추억하고 이야기하는 일이 곧 축구 역사 더듬기의 시작이다.

올 여름 '축구의 나라' 브라질에서는 열아홉 번째 축구의 역사가 쓰일 예정이다.

새로운 주인공이 추가되기 전에 월드컵 위인전의 앞 챕터들을 우선 훑어봐야 한다.

걱정마시라.

월드 No.1 풋볼 매거진 <포포투>가 여러분 대신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혔다.

과거 월드컵을 찬란하게 빛냈던 레전드를 소개한다.

                                                                     ###

 

 

Pele is...

이름 그 자체로 전설인 브라질의 축구스타.

20세기에서 21세기를 관통하는 단 한 명의 축구천재.

17세에 이미 '완성된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세 차례 월드컵 우승을 통해 '황제'로 군림했다.

 

축구사에 수많은 천재들이 등장하고 셀 수 없는 영웅들이 족적을 남겼지만

펠레의 아성을 완벽하게 뛰어넘은 이는 없다.

축구에서 이상적인 승부로 여겨지는 3-2 스코어를 사람들은 '펠레스코어'라고 한다.

등번호 10번이 최고의 축구선수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는 것은 펠레의 번호였기 때문이다.

 

1970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우승을 이끈 마리오 자갈로 감독은

" 펠레가 곧 축구이자, 축구가 곧 펠레." 라고 말했다.

선수로서의 펠레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 중 하나는 산토스FC다.

펠레가 처음 팀을 찾았을 때만 해도 산토스는 상파울루 주(州)의 '신성 클럽' 정도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펠레가 프로무대에 데뷔하면서 동시대 가장 유명한 클럽이 됐다.

프로 데뷔 시즌부터 최다득점자가 된 펠레는 다음 시즌 팀을 상파울루 주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후 아홉 차례의 주 챔피언, 다섯 번의 전국 챔피언, 두 번의 남미컵 우승 타이틀을 팀에 안겼다.

 

그 사이 유럽에서 수차례 러브콜이 쏟아졌지만 산토스를 사랑했던 펠레는 유럽행을 고사했다.

펠레가 산토스를 만들진 않았지만 펠레야말로 산토스의 모든 것이라는 신화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Pele in FIFA World Cup

1958년 스웨덴 월드컵은 펠레의 전설이 태동한 무대다.

당시 그의 나이 17세.

8강전에서 기록한 골은 대회 역사상 최연소(17세 239일) 득점기록이었다.

4강전에서는 해트트릭을 폭발시켰다.

역시 대회 역사상 최연소(17세 244일) 해트트릭 기록이었다.

경이로운 득점행진은 결승전까지 이어졌다.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 2골을 몰아넣으며 팀에 우승컵을 안겼다.

 

펠레는 후에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 4강전과 결승전보다 더 중요했던 경기는 웨일즈와의 8강전이었다." 며

대회 첫 골에 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1960년대 월드컵은 펠레와 악연에 가깝다.

1962년 칠레월드컵 첫 경기(멕시코전)에서 1골1도움을 기록하며 브라질의 2-0 승리를 이끌었지만,

체코슬로바키아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며 남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다행히 펠레가 빠진 자리를 동료들이 채웠다.

그 덕에 월드컵 2연패 멤버에 이름을 올리며 웃을 수 있었다.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도 시련의 연속이었다.

첫 경기에서 또 부상을 당했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 복귀했지만 최악의 컨디션 속에 팀의 1-3 패배를 막지 못했다.

 

펠레는

" 그때 당한 부상이 내 선수 생활 중 최악의 부상이었다." 면서

" 대표팀에서 뛰는 것에 회의가 들기도 했다.

  내심 세 번의 월드컵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는 브라질 대표팀 유니폼을 벗었다.

그러나 역시, 시련은 신화를 완성시키는 지렛대였을 뿐이다.

1970년 멕시코월드컵에서 펠레는 화려하게 복귀했다.

월드컵 예선 6경기에 모두 출전한 펠레는 6골을 기록하며 명성을 과시했다.

본선에서도 매 경기 출전하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스스로

" 1958월드컵과 비교해 1970년 대회에서 훨씬 좋은 활약을 보였다." 고 인정할 정도다.

브라질에 또 한 번 월드컵을 안긴 펠레는 대회 MVP를 차지했다.

 

펠레와 함께 토스탕, 히벨리뉴, 제르손, 자이르지뉴 등이 포진했던 당시 브라질은

지금까지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팀'으로 회자되고 있다.

 

 

Pele's Moment

1970년, 서른 살이 된 펠레의 기량은 절정에 달했다.

정신적인 성숙도만큼 기술적으로도 완벽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 덕에 잉글랜드와의 조별 2차전에서 월드컵 사상 최고라 할 만한 명장면이 연출됐다.

 

전반 18분,

카를루스 알베르투로부터 시작된 패스가 오른쪽의 자이르지뉴를 거쳐 중앙으로 높이 날아왔다.

문전으로 달려들던 펠레가 높이 뛰어올라 완벽한 헤딩슛으로 연결했다.

오차 없이 골이 될 것으로 보였던 그 순간, 상대 골키퍼였던 고든 뱅크스가 기적 같은 선방으로 막아냈다.

" 지금도 세계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그 순간에 대해 물어온다.

  월드컵을 대표하는 장면이라며!

  물론 과정이 너무 아름다워서라는 사실을 잘 안다.

  자이르지뉴의 굉장한 드리블과 크로스, 이어진 헤딩이 멋졌다.

  솔직히 말하면 내 선수 생활을 통틀어 그렇게 잘 맞은 헤딩도 없었다.

  나는 결코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펠레의 변이다.

물론 펠레의 브라질은 뱅크스의 선방 활약을 뚫고 기어이 골을 성공시키며 1-0의 승리를 거뒀다.

 

 

Pele after the World Cup

1971년 카나리아 유니폼을 벗은 펠레는 3년 뒤 산토스에도 작별을 고했다.

그러나 1975년 은퇴를 번복하고 미국의 신생프로리그인 북미사커리그의 뉴욕 코스모스에 입단했다.

펠레의 등장으로 축구 불모지 미국에 '사커' 열풍이 일었다.

매 경기 엄청난 관중이 축구장에 들어찼다.

 

로버트 레드포드, 무하마드 알리, 믹 재거, OJ 심슨, 앤디 워홀, 엘튼 존 같은

유명인사들이 줄줄이 경기장을 찾았고

심지어 헨리 키신저 같은 정치인들도 축구를 관람했다.

" 챔피언인 채로 은퇴하고 싶다." 던 바람대로 마지막 순간 역시 남달랐다.

뉴욕코스모스에 리그 우승을 안긴 뒤,

1977년 10월1일 미국으로 친정팀 산토스를 불러 은퇴경기를 가졌다.

 

은퇴 후에도 축구와 바깥 세계의 경계를 허무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국제연합(UN)의 환경대사, 유네스코 대사, 브라질 체육부 장관을 역임했고

영국에서는 명예 기사 작위도 받은 바 있다.

글=배진경, 일러스트=정선명, 사진=포포투, Getty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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