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메이저리그
메이저리그는 오랜 역사만큼 수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그들이 쓴 드라마는 오늘날에도 이야기되며 기념되고 있다.
<출처: kaycha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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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양대 리그에 속한 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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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 <출처: wikipedia>
애초 루스는 타자가 아닌 투수로 주목 받았다.
메이저리그 데뷔 2년째인 1915년 16승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해서
1916년에는 23승을, 1917년에는 24승을 거뒀다.
특히 1916년에는 1.75로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다.
타자와 투수를 거의 반반씩 한 1918년에도 13승을 올리는 등
통산 163경기(선발 148경기)에 등판해 94승 46패, 평균자책점 2.28을 기록했다.
리그 최고 투수를 눈앞에 뒀을 때
그의 타격 재능을 알아본 에드 배로 보스턴 감독은
전설의 홈런왕을 창조해 내며 데드볼 시대도 막을 내렸다.
1918년 11홈런으로 첫 홈런왕에 오른 루스는
1919년 당시로는 한 시즌 최다인 29홈런을 기록하며 야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전까지 기록은 네트 윌리엄스가 기록한 27홈런)
아무리 홈런 타자라고 해도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는 게 고작이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듬해 1월 또 한번 루스는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로는 천문학적인 금액인 12만 5천 달러에 뉴욕 양키스로 현금 트레이드 됐기 때문이다.
베이브 루스가 그런 가치가 있는 선수라는 것을 인정받는데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적 첫해 믿기지 않는 54홈런을 기록한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듬해는 59홈런을 치며 미국의 번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존재가 됐다.
1927년에는 60개의 공을 외야 담장 너머로 날리는 등
한 시즌 50홈런 이상을 4회나 기록했고
통산 홈런 수는 714개에 이르렀다.
꽃이 피면 지는 게 자연의 이치.
1929년 10월 24일 미국 뉴욕 증권시장에 암흑의 목요일이 닥치며
미국의 번영도 베이브 루스의 영광도 어둠 속으로 사그라졌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한 1933년 루스의 홈런 수는 34개로 격감했고
1935년 2월에는 보스턴 브레이브스(현 애틀랜타)로 이적해서
6홈런만을 남기고 쓸쓸히 유니폼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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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는 백인만의 리그라는 상식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1945년 10월.
재키 로빈슨이 브루클린(현 LA 다저스)과 입단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그는 1년 간 마이너리그를 거쳐
1947년 보스턴 브레이브스(현 애틀랜타)와 시즌 개막전에 나서며
오랫동안 야구계를 지배한 인종차별의 벽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재키 로빈슨의 전쟁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야유는 일상이었고 타석에서는 머리를 노린 빈 볼이 예사로 날아왔다.
같은 팀 동료조차도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자행되는 모든 차별에도
로빈슨은 항상 신사적으로 행동했고 서서히 여론도 그의 편이 됐다.
메이저리그에서 10년을 뛰며 통산 타율 0.311, 137홈런, 197도루를 기록했다.
1945년 10월 재키 로빈슨이 브루클린과 입단 계약을 체결하면서
메이저리그는 백인만의 리그라는 상식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출처: wikipedia>
메이저리그가 문호를 개방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보수주의자 케네소 랜디스 커미셔너 체제가 붕괴한 것이다.
랜디스 커미셔너는
1940년대 초반 몇몇 구단이 흑인 선수의 영입을 추진할 때마다 제동을 걸었다.
입으로는
“ 메이저리그 구단이 흑인 선수를 영입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면서도
그게 현실이 됐을 때는 입을 닫고 반대했다.
1944년 랜디스에 이어 제2대 커미셔너에 오른 이는 앨버트 챈들러.
“ 나는 네 가지 자유(언론, 신앙, 빈곤,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신봉한다.
흑인 청년들이 전쟁터에서 훌륭하게 복무했기에
야구에서도 멋진 플레이를 펼칠 것은 분명하다.”
둘째는 흑인 자본의 성장과 함께 급성장한 니그로리그에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1944년 니그로리그 동서 올스타전에는 4만6천여 명이 찾았지만 메이저리그 올스타는 2만9천여 명에 그쳤다. 흑인은 물론 백인도 니그로리그를 찾으며 일부 도시에서는 메이저리그보다 니그로리그의 인기가 더 좋았다. 위협해 오는 니그로리그를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은 스타를 빼내서 리그를 빈 껍데기로 만드는 것 이상은 없었다.
끝으로 셋째는 흑인 사회의 성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흑인 사회는 형식적이지만 공개적인 인종차별 금지를 이끌어냈고 20세기 첫 흑인 메이저리거를 탄생시키는 토대가 됐다.
그렇다면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 30개 전 구단에서 영구 결번되는 등 추앙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1995년 아메리칸리그 MVP 모 본(당시 보스턴)의 수상 소감에서 찾을 수 있다. “ 지금의 젊은 선수들은 한층 더 예전 선수들을 존경해야만 한다. 내가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것도 재키 로빈슨이 있었기 때문이다.” |
뉴욕 두 구단의 서부 행
1957년 5월 뉴욕은 충격에 휩싸였다.
구단주 회의에서 내셔널리그의 뉴욕 자이언츠와 브루클린 다저스의 프랜차이즈 이전이 승인됐기 때문이다. 자이언츠는 1957년까지 리그 우승 17회에 월드시리즈를 5회나 제패한 명문 구단이고
다저스는 1952년부터 1956년까지 5년간 4회나 리그 왕좌에 오르는 등
1940년대 후반부터 강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거기에 아메리칸리그 양키스까지 더해서
뉴욕은 항상 가을 야구가 열리는 ‘야생야사’(野生野死)의 구도(球都)였다.
뉴욕 야구의 황금기가 구단 이전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내셔널리그의 두 명문 구단이 뉴욕을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다저스의 홈구장인 에베츠 필드와 자이언츠의 안식처인 폴로 그라운즈는
수많은 드라마가 만들어진 무대였지만 세월의 무게가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적은 수용 인원과 낡은 시설 그리고 주변 치안 불안.
이에 월터 오말리 다저스 구단주는 브루클린 시에 교통편이 좋은 지역에 새 구장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시는 묵묵부답.
그때 대륙 반대편에 있는 LA 시가 호조건을 제시했다.
시 근교에 300에이커(서울광장의 약 91배 크기)의 토지와 고속도로 정비를 포함한
500만 달러에 이르는 인프라 정비 예산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1913년 에베츠 필드 opening day. <출처: wikipedia>
사실 초창기 메이저리그 각 구단은 미국 동부 해안에서 중서부 지역에 걸쳐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러다가 1953년 브레이브스가
보스턴에서 밀워키로 이전해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프랜차이즈 이전에 나서는 구단이 늘어났다.
1954년에는 브라운스가 세인트루이스에서 볼티모어(팀명을 오리올스로 개칭)로 옮겼고
1955년에는 어슬레틱스가 필라델피아에서 캔자스시티로 이전했다.
그 배경에는 교통의 발전과 TV 방영권 수입의 증가 등이 있었다.
이런 시대적 변화를 감지한 오말리는 LA로 구단 이전을 결정했다.
그런데 다저스 한 구단만 서해안 지역으로 옮겨서는 경기 일정을 짜는 게 어려웠다.
이에 동병상련이던 자이언츠를 설득해서 함께 서부로 나아간 것.
다저스의 LA 이전은 구단 경영의 수익성과 효율성을 위해 연고지와 결별한 최초의 사례가 됐다.
하지만 졸지에 팀을 잃은 팬들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뉴욕에서
“ 20세기 3대 악인은 히틀러와 스탈린, 그리고 월터 오말리” 라는 말이 나돈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전년도 꼴찌팀인 뉴욕이 1969년 월드시리즈를 제패할 것으로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미라클 메츠’ 의 시작이었다. <출처: kaychae.com>
구단 확장
메이저리그는 양대 리그가 출범한 1901년 이래
60년 동안 16개 구단 체제(각 리그에 8개 구단씩)를 유지했다.
1961년 미네소타로 이전한 세너터스(현 미네소타 트윈스)를 대신해서
또 다른 세너터스(현 텍사스 레인저스)가 워싱턴에 생겼고
애너하임에는 에인절스가 창단하며 철옹성과 같은 16개 구단 체제는 무너져 내렸다.
1962년에는 뉴욕 메츠와 휴스턴 콜츠 포티파이브스(1965년에 팀명을 지금의 애스트로스로 변경)가,
1969년에는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시애틀 파일러츠(현 밀워키 브루어스)
그리고 첫 캐나다 구단인 몬트리올 엑스포스(현 워싱턴 내셔널스)가 신생팀으로 가입했다.
또한 1977년에는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시애틀 매리너스가 창단하며 구단 수는 26개로 늘어났다.
1993년 내셔널리그에 플로리다 말린스와 콜로라도 로키스가 가입했고
1998년에는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신생팀으로 가입하면서
30개 구단 체제로 개편됐다.
30개 구단 체제
1960년대 메이저리그가 구단 증설에 나선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는 교통수단의 발달로 대도시만이 아니라
주변의 위성 도시 주민도 야구장을 찾는 고객이 됐다는 점이다.
과거라면 흥행이 어려운 중소 도시도 충분한 관중 동원력을 갖게 된 것.
거기에 대중매체의 발달로 TV 방영권 등 구단 수입이 다양해진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둘째는 메이저리그를 위협하는 요소를 미리 방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1960년대 초 뉴욕, 휴스턴, 캔자스시티 등을 중심으로
메이저리그에 대항한 제3의 리그가 창설될 움직임이 나타난 것.
1914년과 1915년 제3의 리그 페더럴리그와 벌인 치열한 경쟁으로 죽다가 살아난 메이저리그 각 구단은
제3의 리그라는 말은 자다가도 경기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움직임을 막기 위해 구단 확장이 이뤄진 것이다.
구단 확장으로 고달파진 것은 선수들이다.
물론 새로운 일자리가 늘어나고 구단 수입의 증가에 발맞춰 연봉도 크게 뛰었지만
미국 전역을 오가는 경기 일정은 가혹하기 그지없다.
베이브 루스가 기차로 동부 지역 일부를 여행한 것과는 달리
지금의 선수는 비행기로 이동하며 시차에도 적응해야 한다.
또 구단이 늘어나고 드래프트 제도와 FA제도 등이 시행되면서
과거 양키스처럼 특정 팀이 월드시리즈 우승을 독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됐다.
FA(프리에이전트) 제도 도입
1969년 시즌이 끝나고 나서
세인트루이스는 외야수 커트 플러드에게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 됐다고 통보했다.
7번이나 골드글러브를 받는 등 구단을 위해 헌신한 플러드는 일방적인 트레이드 통보에 반발했다.
“ 세인트루이스에서 12시즌을 뛰었지만
나는 내 뜻과는 상관없이 매매되는 구단의 소유물에 불과했다.
이것은 너무나도 비인간적인 처사다.”
1970년 1월 이 트레이드를 부당하다고 생각한 플러드는 법에 호소했다.
핵심은 보류 조항이 독점금지법 위반인지 여부였다.
(보류 조항 - 익년도 선수 계약 체결 권리로
실제로는 보유 대상 명단에 오른 선수는 영원히 그 구단이 재계약할 권리를 갖게 된다)
사실 이전에도 메이저리그가 독점금지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법정 다툼은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1915년 제3의 리그 ‘페더럴리그 사건’ 등을 통해
“ 프로야구는 독점금지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는 판결을 손에 넣은 상황.
이것에 플러드가 정면 도전한 것이다.
법정에서 플러드는
“ 돈을 많이 받는 노예라고 해도 노예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며 호소했지만
판결은 바뀌지 않았다.
패소.
그러나 그의 투쟁으로 선수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게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1972년에는 연금 문제를 둘러싼 최초의 파업이 13일 동안 벌어졌고
1975년에는 이른바 ‘피터 사이츠의 결정’으로
일정 조건을 갖춘 선수에게는 이적의 자유, 즉 FA(프리에이전트) 자격을 줬다.
한·일 양국의 자존심, 박찬호와 노모
1994년 8월 12일 선수노조는 파업에 돌입했다.
구단주들이 선수들의 연봉총액을 제한하는 ‘샐러리캡’ 의 실시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결국 노사 양측은 타협에 실패하며 시즌도 막을 내렸다.
세계대전 속에서도 열렸던 월드시리즈가 처음으로 중지됐다.
이듬해 구단주들이 양보하며 선수노조의 파업도 끝이 났다.
하지만 야구팬들은
‘억만장자(구단주)와 백만장자(선수)의 싸움’ 에 비유하면서 야구장으로 가는 발길을 뚝 끊었다.
이 위기를 구한 것이 태평양 건너에서 불어온 한 줄기 ‘토네이도’ 였다.
1995년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에이스 노모 히데오가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을 때
그의 성공을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1981년 발렌수엘라 마니아에 버금가는 노모 마니아가 탄생했을 정도로 그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6월 22일 뒤늦게 첫 승을 올린 그는
전반기에 평균자책점 1.99에 9이닝 당 11.86개라는 엄청난 탈삼진을 기록했고
이해 신인왕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1996년에는 투수들의 무덤 쿠어스필드에서 노히트노런을 작성한 데 이어
2001년에는 디트로이트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거두며
역대 4번째로 양대 리그에서 노히터를 기록한 투수가 됐다.
2008년 은퇴할 때까지
메이저리그에서 12시즌을 뛰며 통산 123승 109패, 1,918 탈삼진에 평균자책점 4.24를 남겼다.
노모의 동양인 최다승을 기록을 깬 이가 ‘코리안 특급’ 박찬호다.
1994년 1월 LA 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대런 드라이포트와 함께 역대 17번째로 마이너리그를 경험하지 않고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선수가 됐다.
그러나 단 2경기에 등판하고 마이너리그 행.
본격적인 메이저리거로 활약한 것은 1996년부터다.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5승을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1997년부터 2001년까지 5시즌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며 팀의 주축 투수로 성장했다.
2002년에는 5년간 6,500만 달러에 이르는 초대형 계약을 맺으며 텍사스로 이적했지만
허리 부상에 시달리며 타자를 압도하는 강력한 구위는 사라졌다.
이후 여러 구단을 거쳐 피츠버그의 유니폼을 입은 2010년 10월 2일
플로리다를 상대로 구원 등판해 3이닝 6 탈삼진으로 호투하며 노모를 넘어서는 통산 124승을 기록했다.
금지 약물 스캔들
메이저리그 최초의 40홈런-40도루를 달성한 호세 칸세코,
베이브 루스와 행크 애런을 뛰어넘으며 역대 최고의 홈런왕에 우뚝 선 배리 본즈,
걸어 다니는 억만장자 알렉스 로드리게스,
역대 4번째로 3,000안타와 500홈런을 이룬 라파엘 팔메이로,
사이영상 수집가 ‘로켓맨’ 로저 클레먼스,
홈런 반 삼진 반 ‘빅 맨’ 마크 맥과이어,
‘타점 머신’ 매니 라미레스
‘빅 파피’ 데이비드 오티스 등.
이들의 공통점은 금지 약물에 손을 대며 하루아침에 명예가 별똥별이 된 스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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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 약물 복용이 만천하에 밝혀지며
선수들의 기록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가 적지 않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스테로이드 사용이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전 시대라고 해서 약물로부터 안전한 것은 아니다.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는 이미 1950년대부터 스포츠 계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각성제와 호르몬의 역사는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 선수들도 암페타민을 스포츠 음료 마시듯이 입에 들이부은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의 부정을 들어서 실망을 나타내기 보다는
철저한 관리·통제를 통해 투명성을 확보해 나가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약물 스캔들도 스포츠 계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다.
2. 일본 프로야구
1950년 6월 28일 일본 프로야구 첫 퍼펙트게임이 나왔다.
그 주인공은 요미우리의 후지모토 히데오(한국 이름 이팔용)이다.
투구 수는 92개이며 경기 시간은 1시간 19분이었다.
일본에서 최초의 프로야구팀인 일본운동협회가 탄생한 것은 1920년.
1922년 한국과 만주에서 순회 경기를 가지며 큰 인기를 끌었지만 간토 대지진으로 일시 해산했다.
1924년 효고현으로 옮겨 다카라즈카 운동협회로 활동하다가
1929년 경제 불안 등으로 또 한 번 해산의 아픔을 겪었다.
1925년 2차 대륙 원정 때는 손효준, 백효득, 김정식, 정인규, 한기준, 함용화 등이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1934년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등 메이저리그 올스타와 경기를 위해
대일본도쿄구락부(현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탄생했고
1935년에는 오사카야구구락부(현 한신 타이거스)가 창단하며 직업 야구 붐이 조성됐다.
1936년에는 일본직업야구연맹이 창립하며 본격적인 프로야구가 막을 올렸다.
그리고 1950년 지금과 같은 양대 리그로 재편되며 일본야구기구가 탄생했다.
일본 야구의 양대 리그
이해 11월에 열린 제1회 일본시리즈에서는
퍼시픽리그를 제패한 마이니치가 센트럴리그 우승팀 쇼치쿠를 4승 2패로 꺾고 왕좌에 올랐다.
1951년에는 제1회 올스타게임이 개최됐고
1955년에는 2군 리그인 이스턴리그(센트럴리그)와 웨스턴리그(퍼시픽리그)가 결성됐다
카리스마의 마술사들, 미하라와 미즈하라
미하라 오사무와 미즈하라 시게루.
같은 가가와현 다카마쓰시 출신으로 일본 프로야구 초창기를 대표하는 명감독들이지만
운명은 그들을 영원한 라이벌로 만들었다.
1947년 요미우리 사령탑에 오른 미하라는
1949년 팀을 세계대전 후 첫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독선적인 팀 운영에 불만이 나오며
이듬해는 시베리아에 억류됐다가 복귀한 미즈하라에게 지휘봉을 넘겨줬다.
절치부심한 미하라는 1951년 니시데쓰로 옮겼고 미즈하라와 숙명의 맞대결이 시작됐다.
미즈하라는 감독 첫해인 1950년 3위에 머물렀지만
1951년부터 1955년까지 4번이나 일본시리즈 정상에 섰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는 3연패)
미하라는 니시데쓰를 1954년 퍼시픽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일본시리즈에서는 주니치에 3승 4패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감독은 1956년부터 1958년까지 3년 연속으로 일본시리즈에서 만났다.
1956년 일본시리즈에서 미즈하라의 요미우리를 4승 2패로 꺾으며 미하라는 지난 시절 울분을 앙갚음했고
1957년에는 4승 1무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미즈하라의 콧대를 꺾었다.
1958년 일본시리즈는 한 편의 극적인 드라마가 연출됐다.
니시데쓰는 3연패 후 4연승하며 3년 연속 일본시리즈 왕좌에 올랐다.
이후 미하라는 1960년 만년 하위팀 다이요의 지휘봉을 잡으며 센트럴리그에 복귀했다.
그리고 그 해 미즈하라의 요미우리를 따돌리고 구단 역사상 첫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일본시리즈에서는 다이마이(현 롯데)에 4연승하며 일본 정상에 우뚝 섰다.
1961년 도에이로 옮긴 미즈하라는 팀을
1962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명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어느 일본 야구 관계자는
“ 미하라 감독은 선수에게 종교 지도자와 같은 존재였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철저하게 선수를 지배하며
자기를 믿고 따르면 승리한다는 무의식적인 신앙심으로 팀을 결속시켰다.” 고 밝혔다.
도에이 시절 미즈하라 감독과 한솥밥을 먹은 백인천 전 감독은 ‘인(忍)의 지도자’ 라고 평가했다.
“ 참을성이 아주 강했다.
승부수를 함부로 쓰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참고 견디면서 기회를 기다렸다.
그걸 보고 우리는 ‘왜 안 쓰나?’ 라고 의문을 가졌는데 경기 종반에 그 기회가 딱 오더라고.
그런 참을성을 많이 배웠다.”
장애를 딛고 불굴의 의지를 불태운 장훈.
일본 프로야구에서 피폭자수첩을 가진 이는
그와 노닌 와타루 전 롯데 감독밖에 없다. <출처: 안준철>
가네다 400승과 장훈 3,000안타
일본 프로야구계에서 ‘천황’ 이라고 불린 재일교포가 가네다 마사이치다.
1950년 7월 고교 2학년을 중퇴하고 만년 하위팀 고쿠데쓰(현 야쿠르트)에 입단하며
좌완 강속구 투수의 신화는 시작됐다.
“ 프로야구라고 해서 강할 줄 알았는데 약해 빠졌다.
오늘 경기의 고쿠데쓰보다 내가 다녔던 교에이상고가 더 강하다.”
프로에 입단해서 처음으로 지켜본 주니치와 경기에서 0-4로 패한 것을 보고 한 말로
독선적이며 지배적인 성격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지배한 것은 성격만이 아니라 마운드도 마찬가지였다.
입단 2년째부터 1964년까지 14년 연속 20승 이상을 거뒀다.
당시 고쿠데쓰의 전력이 더 강했다면 매년 30승을 올렸을 것이라는 평가도 적지 않다.
1965년에는 요미우리로 이적했고
1969년 10월 10일 주니치를 상대로 통산 400승을 기록했다.
‘시속 160km에 육박하는 강속구’와 낙차 큰 커브 앞에 타자들은 탈삼진의 제물이 될 뿐이었다.
통산 탈삼진 숫자는 4,490개.
은퇴 후에는 1973년 롯데 사령탑에 올라
1974년에는 팀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오른손에 큰 화상을 입고서도 일본 최고의 안타 제조기로 이름을 떨친 장훈.
1959년 도에이에 입단해서 타율 2할7푼5리, 13홈런으로 생애 한번 뿐인 신인왕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이듬해는 타율 3할2리를 기록했고 1981년까지 23시즌을 뛰며 16번이나 3할 이상을 기록했다.
1961년 첫 수위타자에 오르는 등 타율왕을 7회 차지했고(1967년부터 1970년까지 4년 연속 수상)
1962년에는 타율 3할3푼3리, 31홈런, 99타점으로 도에이를 우승으로 이끌며
시즌 MVP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1980년 5월 28일 한큐의 야마구치 다카시를 상대로 일본 프로야구 첫 3천 안타를 기록했고
통산 안타 수는 3,085개.
은퇴 후에는 프로야구 지도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한국 프로야구 총재 보좌역을 맡는 등 한국 야구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 (장)훈이 형은 승부욕이 아주 강했다.
누구한테라도 지고는 못 살았다.
그런 승부욕은 야구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잘 나타났다.
내기에 강했고 무엇을 하더라도 반드시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런 분명한 성격은 대인관계에서도 잘 나타나서 사람을 사귈 때도 좋고 싫다는 게 분명했다.”
백인천 전 감독의 회고다.
요미우리 일본시리즈 9연패와 on포
1961년 미즈하라 감독과 배턴을 터치해서 요미우리 사령탑에 오른 이가
선수 시절 ‘타격의 신’ 이라고 불린 가와카미 데쓰하루.
가와카미 야구는 ‘팀 승리를 위한 개성의 말살’ 로 정의할 수 있다.
나가시마 시게오, 오 사다하루, 장훈, 가네다 마사이치 등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슈퍼스타도
가와카미 아래에서는 보통의 선수와 마찬가지였다.
선수의 사생활까지 철저하게 통제해서,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반에 모범이 되는 선수상을 만든 것도 가와카미 야구의 공적 중 하나다.
강훈련을 통한 지키는 야구와 한 점을 뽑아내는 작전 야구를 앞세워서
지휘봉을 잡은 14년 동안 11번이나 일본시리즈를 제패했다.
특히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일본시리즈 9연패는 영원히 깨지지 않는 불멸의 대기록으로 평가 받고 있다.
“ 나는 야구공을 통해 사회를 엿보고 세계를 직시하고 우주를 느끼고 있습니다.”
가와카미 감독의 상투어로 야구에 대한 몰입,
또는 절박한 심정을, 무심(無心)의 자유를 이야기한 것이다.
1958년 나가시마 시게오가 입단한 데 이어
1962년 오 사다하루가 외다리 타법을 완벽하게 몸에 익히며 탄생한 것이 ‘ON포’ 다.
두 선수가 기록한 백투백 홈런 수는 106개.
한 시즌에 60홈런-180타점을 합작하는 것은 기본 사양이었다.
나가시마는 신인왕에 MVP 5회, 수위타자 6회, 홈런왕 2회, 타점왕 5회를 차지했고
오 사다하루는 MVP 9회, 수위타자 5회, 홈런왕 15회, 타점왕 13회를 기록했다.
2000년 일본시리즈에서는 on의 감독 대결로 관심이 쏠렸다.
결과는 나가시마의 요미우리가 오의 다이에(현 소프트뱅크)를 4승 2패로 물리치고 정상에 올랐다.
1980년대 이후 세이부는 리그 우승 16회, 일본시리즈 제패 10회를 기록하는 황금기를 맞았다.
세이부는 적극적인 투자를 앞세워 유망한 선수를 잇달아 영입해 스타로 키웠다. <출처: 안준철>
세이부 황금 시대를 만든 네모토 매직
세이부 라이온즈는 1982년부터 1994년까지 퍼시픽리그 우승 11회에 일본시리즈를 8회 제패했다.
요미우리의 가와카미 시대에 버금가는 황금기를 맞이한 것이다.
니시데쓰 시절인 1963년 일본시리즈 왕좌에 오른 이후 우승권과는 거리가 멀던 세이부가
10여 년 동안 일본 프로야구를 쥐락펴락할 수 있었던 것은 네모토 리쿠오(작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프로야구 유일의 GM(제너럴 매니저)으로 평가 받는 네모토는
대형 트레이드와 신인 드래프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팀 전력을 강화했다.
1978년 시즌이 끝난 후 한신과 대형 트레이드를 통해 40홈런을 치는 다부치 고이치를,
롯데에서 자유계약으로 풀린 노무라 가쓰야를 받아들였고
모리 시게카즈, 마쓰누마 히로히사, 마쓰누마 마사유키, 아키야마 고지,
이토 쓰토무, 구도 기미야스, 이시게 히로미치 등 우수한 신인을 잇달아 영입했다.
그리고 1982년에는
“ 이제 (선수) 육성의 시대는 끝났다.
앞으로는 이기는 야구를 할 차례다.” 면서 관리 야구의 대명사 히로오카 다쓰로에게 지휘봉을 맡겼고
19년 만의 퍼시픽리그 우승에 이어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를 4승 2패로 제압하고 24년 만에 일본 프로야구 정상에 섰다.
1983년에는 요미우리와 치열한 접전 끝에 4승 3패로 이겨 일본시리즈 2연패를 달성했다.
1985년 드래프트에서는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획득하며 아카야마와 함께 강력한 중심 타선을 구축했다.
1986년에는 팀 운영에 이견을 나타낸 히로오카를 대신해서 모리 마사아키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모리 감독은 1994년까지 리그 우승 8회, 일본시리즈를 우승 6회를 기록해
네모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성적으로 나타냈다.
한편 네모토는
1993년 만년 하위팀인 다이에(현 소프트뱅크)로 자리를 옮겨서 ‘세이부 매직’을 재현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 참을성 있는 나무가 꽃을 피운다.”
네모토의 신조로 히로시마, 세이부, 다이에 등에서 리빌딩을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기도 하다.
팀을 재건하려면 적극적인 투자와 눈앞의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리그 재편 소동
2004년 6월 13일 오릭스와 긴데쓰의 합병이 발표되면서
일본 프로야구계는 리그 재편 문제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 또 다른 합병도 있을 것이다.” 라든지
“ 양대 리그에서 하나의 리그로 가기 위한 움직임.” 이라는 소문들이 자자한 가운데
선수회는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파업에 돌입했다.
선수와 팬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구단주를 중심으로 한 리그 재편 움직임은
신규 구단 참가 및 구단 매각으로 급선회하며 양대 리그가 유지됐다.
소프트뱅크가 경영난에 허덕이던 다이에를 사들였고
50년 만에 신생 구단인 라쿠텐이 탄생한 것이다.
리그 재편 후 양대 리그
백인천 전 감독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뛴 19시즌 가운데 13회나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하지만 자신은 “ 장타자가 아닌 중거리 타자였다.” 고 밝혔다. <출처: 손윤>
일본에 간 한국 선수들
광복 후 한국인 최초의 프로야구 선수이자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이는 백인천 전 감독이다.
백 전 감독은 1963년 장훈 등이 활약하던 도에이에 입단해
수위타자 1회를 비롯해 19시즌을 뛰며 통산 타율 2할7푼8리, 209홈런, 776타점, 212도루를 남겼다.
백 전 감독에 이어 1966년에는 중앙고 강속구 투수 이원국이 도쿄 오리온즈(현 지바 롯데)에 입단했지만
외국인 선수 제한 등으로 1군 무대에 서지는 못했다.
이후로도 몇몇 선수가 일본 진출을 타진했지만 군대 문제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또다시 일본 무대가 가까워진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1996년 조성민이 요미우리와 장기 계약을 체결했고
1998년에는 전반기에만 7승을 올리며 주축 투수로 성장했다.
그러나 팔꿈치 부상으로 뚜렷한 성적을 남기지 못하고
2002년을 끝으로 요미우리 유니폼을 벗었다.
아마추어 자격으로 일본에 진출한 백인천, 이원국, 조성민과는 달리
한국 프로야구를 거친 선수들이 대거 일본 프로야구를 노크하게 된 시초는 선동열이다.
1996년 주니치에 진출한 선동열은
1999년까지 통산 98세이브를 올리며 나고야의 태양으로 빛났다.
이종범과 이상훈도 주니치의 유니폼을 입고 선동열과 함께 1999년 리그 우승에 일조했다.
‘국민 타자’ 이승엽은 부침이 있지만 2006년 41홈런을 치는 등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144홈런을 기록하며
슬러거로서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또 큰 기대 없이 2008년 야쿠르트 유니폼을 입은 임창용은
2011년 5월 4일 일본에서 통산 100세이브를 달성하는 등 일본 프로야구 최고 마무리 투수로 우뚝 섰다.
반면 김태균, 이범호, 이혜천 등은 큰 활약을 하지 못하고 한국 프로야구로 돌아왔거나 돌아올 예정이다.
3. 그 외 세계야구
한·미·일만이 아니라
대만, 멕시코, 이탈리아, 캐나다, 쿠바, 호주, 푸에르토리코, 도미니카 등에서 프로야구 리그가 열리고 있다.
그 가운데 대만 프로야구와 멕시칸리그에 대해 짧게 알아보자.
대만프로야구
한국, 일본과 함께 아시아 아마추어 야구의 강자인 대만에 프로야구가 생긴 것은 1989년 10월.
1990년 웨이취엔(味全), 슝디(兄弟), 퉁이(統一), 싼상(三商) 4팀이
연간 90경기를 치른 중화직업야구연맹의 첫해 우승팀은 싼상.
1997년에는 대만직업야구대연맹이라는 또 하나의 리그가 발족했는데
선수들을 리그 사무국이 관리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런 방식은 팀 간의 전력 균형에는 장점이 있었지만 경쟁 의식을 고취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었다.
결국 2003년에는 중화직업야구연맹과 통합해 중화직업야구대연맹(CPBL)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그러나 계속된 승부 조작으로 리그 존폐를 위협 받고 있다
대만의 야구 구단
멕시칸리그
1925년에 창설했고 일반적으로 미국 마이너리그 트리플A 수준으로 취급되고 있다.
시즌은 4월부터 9월까지이고 11월부터 이듬해 2월에 걸쳐 윈터 리그인 ‘멕시칸 퍼시픽 리그’가 열린다.
1946년에는 메이저리거와 니그로리거를 대거 영입하며
메이저리그에 대항하는 제3의 리그로 발전을 도모했지만 메이저리그의 강력한 반발로 실패했다.
현재는 16개 팀이 2개 지구로 나뉘어 우승을 다투고 있다.
한국 선수로는 1983년 MBC 청룡에서 활약한 이원국이 1972년 5월부터 1982년까지 150승 85패를 기록했다.
멕시칸 리그
야구전문블로그 <야구라>의 일원.
네이트 등에 야구 글을 기고하고 있다.

출처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6021&path=|456|518|700|&leafId=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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