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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 한번 쳐봐라” 거침없는 직구 인생 … 영원한 11번 최동원

leekejh 2011. 9. 15. 10:22

 

“내 공 한번 쳐봐라” 거침없는 직구 인생 … 영원한 11번 최동원

[중앙일보] 2011년 09월 15일(목) 오전 03:00
최동원 1958 ~ 2011이태일 NC다이노스 대표가 본 최동원
[중앙일보]


2008년 7월 중앙일보 ‘시골의사 박경철의 직격인터뷰’에 응한 최동원씨. 당시 한화 2군 감독이던 그는 이미 병마와 싸우면서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야구에 대한 사랑과 열정만을 이야기했다.




이태일 대표

그곳에 늘 최동원이 있었다. 대한민국 야구 그라운드의 맨 꼭대기. 야구선수가 자신의 두 발로 설 수 있는 가장 높은 곳. 그 마운드에서 타자와 포수를 내려다보면서, 그는 특유의 한결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늘 당당하게. 때로는 도도하게. 언제든 “이 공 한번 쳐봐라”는 식의 거침없는 공을 감추고. 그래서 그의 미소를 바라보는 일은 경외(敬畏)였다. 함부로 덤벼들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최동원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우러름의 대상 최동원은 늘 꼿꼿했다. 정직했다. 성격도, 투구도 ‘대쪽’이었다. 그래서 그의 투구를 바라볼 때면 대나무 숲에서 부는 스산한 바람소리가 들렸다. 대쪽 같은 성격과 ‘오로지’ 앞으로만 나아가는 탱크 같은 투구 스타일. 그는 단 한 번도 그 스타일을 잃지 않고 마운드를 호령했다. 그의 상징이 된 등 번호 11번은 그 대쪽 같은 정직함의 표현이었으리라. 그의 삶은 나란히 뻗은 기차 레일처럼 곧았다.




최동원씨가 1984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완투승 한 뒤 포수 한문연 선수와 포옹하고 있다(사진 왼쪽). 지난 7월 22일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열린 경남고 대 군산상고의 ‘레전드 리매치’에 참가한 최동원씨. 몹시 야윈 모습이었다. [중앙포토]

그는 1984년 한국시리즈 4승, 그 한 편의 드라마로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다. 프로야구 최고의 무대 ‘가을의 고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거둔 4승은 그를 ‘레전드(전설)’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 롯데와 삼성의 한국시리즈 7차전, 마지막 9회 말을 되짚어 본다. 3승3패로 맞선 두 팀. 6-4로 앞선 롯데 마운드에는 최동원. 차례로 등장하는 삼성 타자는 정현발, 배대웅, 장태수. 이 세 명의 타자를 최동원은 어떻게 잡아냈나. 맞다. 세 명 모두 삼진. 마지막 타자 장태수는 특유의 삐끗하지 않은 직구로 헛스윙 삼진. 그 마지막 순간까지 담대할 수 있는 용기,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신념. 그렇게 최동원은 최동원다웠다. 아니, 그게 최동원이었다.

그는 2007년부터 암(癌)이라는 상대와 싸웠다. 한때 완치 판정을 받고 그라운드에 돌아왔지만 지난해 말부터 다시 암세포가 그의 몸에서 자랐다. 그리고 2011년 9월 14일. 최동원이라는 별은 모든 사람에게 더 이상 바라볼 수 없는, 가슴속의 별이 되었다.

최동원과 선동열. 프로야구 두 전설적인 투수의 명승부 열전을 소재로 한 영화 ‘퍼펙트 게임’이 개봉을 앞두고 있는 등 영원한 우상 최동원을 추억할 수 있는 여러 기회가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가 마운드에서 보여줬던 특유의 카리스마는 이제 다시 볼 수 없다. 그가 던진 마지막 투구, 면도날 같았던 그 직구는, 홈(home)플레이트를 통과했다. 그 공을 영원히 가슴속에 담아두리라.

이태일 NC 다이노스 대표이사

 

 

 

 

'안타까운 최동원', 야구인들의 탄식

[OSEN] 2011년 09월 15일(목) 오전 07:02


[OSEN=박현철 기자] "돌아가신 뒤에야 제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불세출의 대투수. 그러나 은퇴 이후 오랫동안이 아닌 그의 타계 직후 그 이야기가 쏟아지고 부각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프로 8년 통산 103승 74패 26세이브 평균자책점 2.46의 기록을 남긴 뒤 프로 유망주 외에도 유소년 야구에 애정을 쏟다 세상을 등진 故 최동원의 영전을 바라보는 야구인들의 이야기가 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다.
 
고인은 지난 14일 새벽 2시 2분 경 직장암 세포의 전이로 인해 향년 53세를 일기로 아까운 생을 마감했다. 선동렬 전 삼성 감독과 함께 한국 프로야구 최고 투수로 명성을 떨치던. 그러나 지도자로서 제 위력을 다하지 못한 야구인은 너무도 안타깝게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그를 사랑하는 이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2001년과 2005~2006시즌 한화 투수코치, 2007시즌부터 2년 간 한화 2군 감독으로 재임한 뒤 이듬해 한국야구위원회(KBO) 경기감독관으로 일했던 고인. 그러나 1990년 삼성서 은퇴한 이후 그는 10여 년 간 현장의 코칭스태프가 아닌 변방의 야구인으로 재직해야 했다.
 
때로는 브라운관에 나타났고 의류 사업에도 진출하는 등 오랜 시간 동안 그는 야구 1차적 현장에서 떠나있었다. 현장 복귀 이전에도 유소년 야구 발전에 집중하는 등 프로 무대는 한동안 그를 외면했다.
 
그를 아는 야구인과 관계자들은 "스타 플레이어 출신임에도 자신을 스스로 드높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너무도 착한 사람이었다. 나쁘게 보면 '우유부단' 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이라며 혀를 찼다. 1988년 선수협의회를 창설하려했던 그의 움직임이 '화합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달갑지 않은 이미지를 심어주고 말았다.
 
빈소에는 많은 야구인이 찾아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그를 OB(두산의 전신) 코치 시절 상대 에이스로 만났던 이광환 전 히어로즈 감독을 비롯한 야구인들은 고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대투수였다. 그것도 팀을 위해 헌신했다는 점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현역 시절 라이벌이던 선동렬 전 삼성 감독 또한 "라이벌이기 이전 내게 투수가 갖춰야 할 점을 가르쳐 준 선배"라며 겸양의 의사를 표했다. 1984년 한국시리즈서 혼자 롯데의 4승을 책임졌다는 점은 고인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요즘 투수들 중 누가 '단기전서 투구수를 지켜준다'라는 이야기 하에서라도 팀을 위해 한국시리즈 4승을 따낼 수 있을까. 지금 투수들은 아무도 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것이다. 고인은 정말 대단한 투수였다". 빈소를 찾은 모든 야구인들이 故 최동원의 역투를 회상하며 한 공통된 이야기다.
 
야구인들은 현역 시절 고인의 위력보다 그의 은퇴 후가 그리 풍요롭고 화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선수협 태동의 움직임을 보였다가 트레이드되는 비운을 맞았던 고인은 결국 선수 생활 은퇴 후 변방에서 '잘 알려진 야구 선수'라는 꼬리표를 달고 방송에 출연했고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야심차게 사업 일선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자신의 직속 후배들은 가르치지 못했다.
 
한 야구인은 "왜 돌아가시고 나서 고인이 다시 평가를 받아야 하는가. 이 세태는 분명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라며 뼈 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나이는 같지만 1년 터울로 야구 선후배가 되었던 김경문 NC 다이노스 초대감독 또한 "동원 선배의 안타까운 별세가 남아있는 야구인에게 '무언가 잘못하지 않았는가'라는 숙제를 던져준 것 같다"라며 비통해했다.
 
지난 7일 타계한 장효조 삼성 2군 감독 또한 그러했고 1주일 시차로 생을 마감한 최동원 전 감독도 짧지 않은 야인의 길을 걸었다. 팬들은 '전성기의 최동원과 선동렬, 누가 더 우월했는가'라는 논제로 갑론을박을 펼쳤지만 현장은 고인을 발탁하지 않으며 '전설 속의 누군가'로 만들었다.
 
빈소를 찾은 김경문 NC 감독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야구계의 큰 별이 졌다. 최동원 선배의 별세는 우리 야구인에게도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반성점을 던져주는 것 같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현역 은퇴 후 야인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더 돌아보지 못했다는, 현역 감독으로서 회한 섞인 한 마디였다.

 
팬들이 사랑하는 야구가 더욱 발전하고 선수들이 기량을 절차탁마 하는 데 힘쓴다면 또 한 명. 그리고 또 한 명의 레전드 스타가 얼마든지 탄생할 수 있다. 그러나 팬들의 조망권에서 사라지면 관심도 빠르게 줄어드는 것이 세상 이치다. 빈소를 찾은 야구인들의 후회는 그저 단순한 말 한 마디에 그치지 않았다.  
 
farinelli@osen.co.kr

<사진> 이대선 기자 sunda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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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vs선동열, 전설의 1승1무1패

[스포츠칸] 2011년 09월 14일(수) 오후 09:31
선동열 전 삼성 감독(왼쪽)이 KBO 홍보위원이던 2001년 미국 애리조나 캠프에서 최동원 당시 한화 코치와 악수하며 활짝 웃고 있다. 스포츠경향 DB

최동원과 선동열 전 삼성 감독의 세 차례 맞대결은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 명승부로 기억되고 있다.

만나기만 하면 ‘끝장 승부’를 벌인 두 투수의 첫 맞대결은 1986년 4월 사직구장에서 이뤄졌다.

둘 다 완투했지만 결과는 해태 선동열의 승리. 롯데 최동원이 3회 송일섭에게 솔로홈런을 맞고 완투패를 당하며 1985년부터 이었던 연승행진을 12경기에서 멈췄다. 반면 선동열은 프로 첫 완봉승을 올렸다.

둘은 4달 뒤인 8월19일 사직구장에서 다시 만났다.

역시 둘 다 완투했고, 이번에는 최동원이 이겼다. 2-0으로 완봉승. 반면 선동열은 수비 실책으로 2점을 내줘 자책점은 없었으나 완투패를 당했다.

그리고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는 1년 뒤, 1987년 5월16일 사직구장에서 탄생했다.

두 선발은 연장 15회까지 5시간 가까이 이어진 혈투가 2-2 무승부로 끝날 때까지 마운드를 지켰다.

최동원은 209개, 선동열은 아직도 역대 프로야구 최다 투구수로 남아있는 232개를 던졌다.

1승1패를 주고 받았던 두 라이벌의 대결은 결국 이렇게 마지막까지 무승부로 끝난 채 영원히 막을 내렸다.

선동열 전 감독은 마지막 대결을 회상하며 “20년 넘게 지났지만 그 경기는 잊을 수 없다. 서로 지지 않으려고 자존심 대결을 함께 했던 선배가 세상을 뜬 것이 비통하다”며 “라이벌로 불렸지만 선배는 내 우상이었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투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해준 롤모델이었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김은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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