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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 10. 20 ] 카다피 고향서 최후‥리비아 내전 종식

leekejh 2011. 10. 21. 01:32

 

카다피 고향서 최후‥리비아 내전 종식(종합3보)

연합뉴스 | 유현민 | 입력 2011.10.20 21:35 | 수정 2011.10.21 00:58 | 누가 봤을까? 50대 남성, 전라

 




NTC 총리 사망 공식확인…대변인 "폭정과 독재의 종말"

호화 영빈관에서 숨진 듯‥나토 공습 피격 사망설도

(카이로·두바이=연합뉴스) 한상용 유현민 특파원 = 민중봉기와 뒤이은 내전으로 쫓겨나 도피 중이던 리비아의 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20일 고향 시르테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이날 과도정부군은 카다피군의 최후 거점인 시르테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42년간 철권을 휘두른 카다피의 사망으로 8개월여에 걸친 리비아 내전은 사실상 종식됐다.

















하지만 `카다피 제거'라는 목적으로 일시 단합돼 있던 국가과도위원회(NTC)가 강력한 구심점을 발휘하지 못할 경우 극심한 분열을 겪으면서 제2의 아프가니스탄화가 우려된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리비아 임시정부인 NTC 마무드 지브릴 총리는 카다피 전 국가원수가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NTC 제2인자인 지브릴 총리는 이날 오후 4시 20분(현지시간)께 수도 트리폴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렸다. 무아마르 카다피가 사망했다"고 선언했다.

마무드 샤맘 NTC 정보장관도 카다피의 시신을 목격했다는 시르테의 시민군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었다고 확인했다.

그는 이어 무스타파 압델 잘릴 NTC 위원장도 카다피의 사망을 공식 확인할 예정이지만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NTC 대변인 압델 하페즈 고가는 이에 앞서 "카다피가 혁명군에 체포된 후 사망했다"고 밝히면서 "이는 역사적 순간이요, 폭정과 독재의 종말"이라고 말했다.

카다피는 이날 자신이 세운 호화로운 영빈관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장에 있었던 과도정부군 아델 부사미르는 "과도정부군 병사들이 그(카다피)를 마구 때렸고, 누군가가 그에게 권총을 발사했다"고 말했다.

아흐메드 바니 과도정부군 대변인은 카다피가 "저항하려 해서 무력화시켰다"고 전했다.

현장에 있었던 다른 병사는 발각 당시 카키색 복장에 머리에는 터번을 두르고 있던 카다피가 생포 순간 "쏘지마, 쏘지마"라고 외쳤다고 전하기도 했다.

카다피는 이에 앞서 과도정부군의 압박을 피해 차량으로 도주를 시도하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군의 공습을 받고 다시 영빈관으로 돌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과도정부군의 다른 지휘관 압델 바신 하룬은 카다피가 차량으로 도주하다 공습을 받아 숨졌다고 말했다.

나토군 대변인 롤런드 대변인은 이날 오전 시르테에서 카다피군 차량 2대를 공습했다고 밝혔으나 이 차량에 카다피가 탑승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AFP통신은 과도정부군 사이에서 '총상을 입은 카다피의 모습'이라며 퍼지고 있는 사진을 입수해 공개했다.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카다피의 시신이 리비아 서부 도시 미스라타의 한 이슬람 사원에 안치됐다고 보도했다.

익명을 요구한 미국 정부 당국자도 AP 통신에 "리비아의 새 정부가 그의 사망을 알려왔다"고 밝혔다.

그동안 여러 차례 체포설이 제기된 카다피 4남 무타심도 숨진 채 발견됐으며 시신이 미스라타로 옮겨졌다고 AFP통신과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카다피의 최후 거점 시르테를 완전히 장악한 과도정부군의 현지 지휘관 유누스 알 압달리는 "시르테가 해방됐고 카다피군은 없다"며 "도주하는 카다피군을 뒤쫓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카다피군을 태운 차량 약 40대가 시르테 서쪽으로 도주했다.

과도정부군 소속 병사들은 시내 중심부에 모여들어 '신은 위대하다'고 외치며 환호했고 승리를 자축하는 자동차 경적이 곳곳에서 울렸다.

한편 카다피 체포 과정에서 리비아 전 국방장관 아부 바크르 유니스가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시르테 야전병원의 의료진 이날 픽업 트럭으로 실려 온 시신 한 구의 신원이 유니스 장관으로 확인됐다고 전했다.

지난 8월23일 반군의 수도 트리폴리 함락을 계기로 종적을 감춘 카다피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고향 시르테 등을 거점으로 강력하게 저항해 왔다.

gogo213@yna.co.kr

hyunmin623@yna.co.kr

 

 

 

 

<독재자 카다피 고향마을서 비참한 최후>

42년 리비아 철권통치‥전세계 최장수 국가원수

연합뉴스 | 김세진 | 입력 2011.10.20 21:31 | 수정 2011.10.20 21:44

 




(서울=연합뉴스) 김세진 기자 = 20일 리비아 국가과도위원회(NTC)에 붙잡힌 직후 사망한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는 42년간 자국을 쥐락펴락했던 '독재자'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권좌를 고수해 온 그였지만, 북아프리카에서 시작된 민주화 시위의 파도가 리비아를 뒤흔든 지 약 8개월 만에 고향 시르테 근처 모래밭에서 굴곡진 일생을 마감했다.

전 세계에서 최장수 국가원수 자리를 지켜온 카다피는 1942년 리비아 시르테 인근의 한 베두인족 텐트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지리학을 공부하다 군에 투신한 카다피는 아랍민족주의자였던 이집트 전(前)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를 '롤 모델'로 삼아 자유장교단을 결성했다.

1969년 친(親)서방 성향의 왕정을 무혈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은 카다피는 1977년에는 사회주의와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하고 독특한 형태의 '인민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며 의회 제도와 헌법을 폐기하고 전제 권력을 휘둘렀다.

카다피가 통치한 지난 40여년간 리비아는 각종 테러는 물론 반미(反美) 무장단체 지원 등으로 국제사회에서 악명이 높았다.

특히 1988년에는 영국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270명이 탑승한 미국 팬암기를 폭파시켜 국제사회의 손가락질을 받았고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중동의 미친 개"라는 비난까지 듣기도 했다.

2003년에는 팬암기 사건 유족들에게 보상을 약속하는가 하면 대량살상무기(WMD) 포기를 선언하며 서방과 '화해 무드'에 돌입했으나 리비아와 국제사회 사이의 갈등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2008년에는 카다피 국가원수의 넷째 아들 부부가 스위스의 한 고급호텔에서 가정부를 폭행한 혐의로 체포된 사건을 계기로 스위스와 2년간 외교분쟁을 겪었다.

이듬해인 2009년에는 스코틀랜드 자치정부가 리비아 유전 개발과 관련한 영국 기업의 로비설에 휩싸인 채 팬암기 폭파 사건 피의자를 석방해 미국이 이에 반발하기도 했다.

카다피는 이후에도 서방 국가는 물론, 사우디 아라비아 등 친서방 아랍국가를 비판하며 자신이 '아랍권 리더 중의 리더'라고 자칭해왔다.

하지만, 그는 중동과 북아프리카 민주화 시위의 영향을 받은 자국 시위대와 시민군이 올해 초 리비아 제2의 도시 벵가지를 중심으로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무력 행동에 돌입하면서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카다피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혈 진압에 나섰으나 결과적으로 시민군의 공세와 나토의 공습에 직면하는 '자충수'를 둔 셈이다.

정부군과 반군간에 6개월간 이어진 내전 끝에 시민군이 수도 트리폴리를 함락했고, 40년 넘게 이어 온 카다피의 철권통치에도 종지부가 찍혔다.

이후 카다피는 모습을 감춘 채 수하들을 통해 '결사 항전' 하겠다는 의사만 내보냈다.

그가 리비아에 있는지 아니면 외국으로 도주했는지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일부 가족과 측근이 외국으로 피신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카다피의 소재에 대한 의혹은 증폭됐다.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으며 과도정부군으로 탈바꿈한 시민군이 카다피 지지 지역인 시르테와 바니 왈리드, 사브하, 주프라를 차례로 점령할 때에도 숨어 지내는 카다피가 리비아의 향후 정치 일정을 불안하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그러나 이날 오전 나토 무인기의 공격을 피하는 과정에서 카다피는 부상한 채 과도정부군에 붙잡혔고, 상처가 컸던 탓에 끝내 목숨을 잃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smile@yna.co.kr

 

 

 

 

<리비아 사태 일지>

 

 

리비아의 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자신의 고향이자 최후 거점인 시르테에서 생포됐다고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 등 외신이 리비아 과도정부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20일 보도했다.

   다음은 반(反) 정부 시위가 처음 발생한 지난 2월15일 이후 리비아 사태 일지다.

   ▲2월15일 = 리비아 제2도시 벵가지에서 반정부 시위 발생
▲2월17일 = 페이스북을 통해 '분노의 날' 행사를 열자는 제안이 나옴
이 행사는 2006년 벵가지에서 열렸던 이슬람주의자 집회에서 14명이 숨진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였으나 민주화 시위로 전환해 시위대와 경찰 간 충돌로 사상자 수십 명 발생
▲2월21일 = 카다피 정권의 유혈 진압에 대한 항의로 전 세계 리비아 대사와 외교관들 잇단 사임
▲2월22일 =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카다피 국영 TV에 등장해 국외 도피설을 부인하고 정부군에 시위대 진압 지시
▲2월26일 =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리비아 정부군의 민간인 유혈 진압을 반인류 범죄로 보고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즉각 조사에 착수토록 요구할 것을 결의
▲3월1일 = 반정부 세력이 리비아 동부와 서부의 여러 도시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한 가운데 수도인 트리폴리는 카다피 정권의 지배 아래 남음
▲3월5일 = 시민군이 벵가지에서 대표기구인 국가 과도위원회(NTC) 발족해 리비아 국민의 유일한 합법적인 대표로 자처
▲3월10일 = 프랑스 정부, NTC를 리비아의 유일한 합법적인 기구로 첫 공식 인정
▲3월17일 = 유엔 안보리가 리비아 내전에서 유엔의 군사적 개입을 승인하는 내용의 결의를 채택해 리비아 영공에 비행금지구역(NFZ) 설정
▲3월18일 = 유엔 안보리 결의 채택 하루 만에 리비아 정부 "즉각적인 정전과 모든 군사작전의 중단" 선언
▲3월19일 = 프랑스 전투기 리비아 영공 진입해 공습 시작
▲3월23일 = 시민군, 리비아 제2의 도시 벵가지에서 임시정부 공식 출범
▲3월30일 = 무사 쿠사 리비아 외무장관 영국으로 망명
▲4월10일 = 아프리카연합(AU) 중재위, 리비아 분쟁 중단 촉구
▲4월11일 = 리비아 시민군, 아프리카연합 중재안 거부
▲4월30일 = 나토 공습으로 카다피 막내아들 사이프 알-아랍과 손자 3명 사망
▲5월1일 = 카다피 지지자, 駐 리비아 영국 대사관 공격. 영국 정부는 런던 주재 리비아 대사 추방
▲5월11일 = 시민군, 서부의 전략 요충지 미스라타 공항 장악
▲5월16일 = ICC 검찰, 카다피에 체포영장 청구
▲5월22일 = 유럽연합(EU), 리비아 동부 벵가지에 연락사무소 개설
▲5월31일 = 이탈리아, 벵가지에 영사관 개설
▲6월9일 = 미국, 유럽 주요국 등 30여 개국 대표가 참여한 리비아 연락그룹이 아랍에미리트(UAE) 수도 아부다비에서 회의를 열어 '포스트 카다피' 논의
▲6월27일 = ICC 카다피 체포영장 발부
▲7월15일 = 미국과 유럽 주요국 등이 참여한 리비아 '연락그룹'이 시민군 NTC를 리비아의 합법적인 정부 체계로 인정
▲7월18일 = 시민군, 석유수출항 브레가 북동부 장악
▲7월28일 = 시민군 최고사령관인 압둘 파타 유네스, 내부 반대파에 피살
▲8월9일 = 캐나다와 덴마크, 자국 주재 리비아 외교관들 추방
▲8월15일 = 시민군, 수도 트리폴리 인접한 서부 전략 요충지 자위야 진입
▲8월20일 = 시민군, 자위야와 즐리탄 장악
▲8월21일 = 시민군, 트리폴리 대부분 지역 장악
▲8월23일 = 카다피 진영의 핵심 거점인 바브 알-아지지야 요새 함락. 시민군 트리폴리 전투 승리 선언
▲9월21일 = 시민군, 카다피군 거점 도시 사브하 장악
▲10월17일 = 시민군, 카다피군 거점 도시 바니 왈리드 장악
▲10월20일 = 시민군, 시르테에서 카다피 생포 주장

 


(서울=연합뉴스) 고유선 기자 = cindy@yna.co.kr

 

 

 

 

42년 철권통치 마감한 '중동의 미친개' 카다피
[뉴시스] 2011년 10월 20일(목) 오후 11:28   가| 이메일| 프린트
【서울=뉴시스】박준형 기자 = '중동의 미친개' 리비아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가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리비아 반군국가위원회(NTC) 압델 마지드 믈레그타는 20일 "시르테에서 붙잡힌 카다피가 생포 당시 입은 심각한 머리 등 부상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42년여 간 리비아를 철권통치한 카다피는 결국 민주화 시위 발생 8개월여 만에 쓸쓸히 일생을 마감했다.

카다피는 1942년 리비아 시르테 인근에서 베두인족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랍 민족주의자였던 이집트 가말 압델 나세르 전 대통령을 존경하던 그는 리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뒤 군에 입대했고, 1969년 당시 27세의 젊은 나이에 쿠데타를 일으켜 이드리스 1세가 통치하던 리비아의 정권을 빼앗았다.

같은 해 9월 리비아 아랍 공화국을 건립한 카다피는 일명 '이슬람 사회주의'라고 불리는 자신만의 독특한 정부를 내세웠다. 이 체제는 복지와 자유, 교육을 강조했고,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음주와 도박을 금지했다. 이 과정에서 카다피는 1975년 자신의 정치사상을 실은 '그린 북(Green Book)'을 출간했다.

그는 1977년 정부를 기존의 공화국에서 사회주의와 이슬람주의, 아랍 민족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 체제로 바꿨다. 자마히리야는 아랍어로 '대중의 국가', '대중에 의한 공동체'를 뜻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카다피는 교육과 의료 혜택을 늘리는 민중을 위한 정책을 추구하고 대형 수로를 건설하는 등 기간산업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카다피는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카다피는 인민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는 구실로 의회 제도와 헌법을 폐기하고 전제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로 변해갔다.

자신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았으며 시민들을 억압했다. 대외적으로도 각종 테러는 물론 반미 무장단체를 지원하는 등 서방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1985년 로마와 빈에서 동시에 발생한 폭탄 테러의 배후로 지목됐고, 이로 인해 1986년 미·영 연합군으로부터 2차례에 걸쳐 보복 공습을 받았다.

특히 1988년 영국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270명의 희생자를 낸 미국의 팬암기 폭파사건에 개입하면서 이후 미국은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 포함했다.

당시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카다피를 '중동의 미친개'라고 부르며 리비아 트리폴리에 있는 카다피의 거주지 바브 알-아지지야를 공습했다. 이로 인해 카디피가 입양한 15개월 된 딸과 측근 등 60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정작 카다피는 가벼운 부상만 입은 채 달아나 한동안 소재가 파악되지 않았다. 그는 중부 사막 지역에서 정예부대를 중심으로 다시 세력을 결집해 복귀했다.

유엔은 1992년 리비아에 제재를 가하며 압박했다. 미국은 1996년 '이란-리비아 제재 법안(ILSA)'을 제정했다. 이에 산유국인 리비아는 원유 수출을 봉쇄당하면서 경제가 극도로 피폐해졌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카다피는 2003년 대량살상무기 자진 폐기를 선언하면서 서방과 화해 무드를 조성했다. 또 2004년 팬암기 테러 용의자를 미국으로 인도하면서 미국과 외교 관계도 복원했다.

하지만 카다피의 리비아와 국제사회 간 갈등은 계속됐다. 2008년에는 카다피의 넷째 아들 부부가 스위스의 한 고급호텔에서 가정부를 폭행한 혐의로 체포된 사건을 계기로 스위스와 2년간 외교 분쟁을 겪었다.

이듬해인 2009년에는 스코틀랜드 자치정부가 리비아 유전 개발과 관련한 영국 기업의 로비설에 휩싸인 채 팬암기 폭파 사건 피의자를 석방해 미국이 이에 반발하기도 했다.

카다피는 평소 여성 편력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해외 방문 시 수십 명의 여성 경호원들에 둘러싸인 베두인족 텐트에서 지내며 2009년 이탈리아 방문 시에는 수백 명의 젊은 여성들을 초대해 이슬람으로 개종을 촉구했다.

올해 초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에 의해 공개된 미국 외교 전문에 따르면 카다피는 내연 관계로 알려진 우크라이나 출신 금발의 미녀 간호사에게 매료돼 혼자서는 여행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명 '카다피의 여인'으로 통하던 미녀 간호사 갈리나 콜로트니츠카(38)는 올해 리비아 유혈 소요 사태 당시 카다피의 곁을 떠났다.

올해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리비아에서도 시위가 발생하자 카다피는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유혈진압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지원을 등에 업은 성난 시위대는 결국 수개월 간 이어진 내전 끝에 수도 트리폴리를 함락하고 카다피의 퇴진을 이끌었다.

ju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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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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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2011년 10월 20일(목) 오후 11:11   가| 이메일| 프린트
시리아 아사드와 예멘 살레 `1순위'北, 통제 더욱 강화할 듯

[세계파이낸스]리비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42년 철권통치가 20일 그의 사망과 함께 종지부를 찍으면서 `아랍의 봄' 열풍이 쓰러뜨릴 다음 독재자가 누구일지 관심을 모은다.

카다피는 지난 1월과 2월 각각 실각한 지네 알 아비디네 벤 알리 전 튀니지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에 이어 아랍권에서 시민 혁명으로 무너진 세번째 독재자로 기록됐다.

리비아에서 반(反) 카다피 시위가 시작된지 8개월여 만이자 1969년 친(親)서방 성향의 왕정을 무혈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집권한지 42년 만의 비극적 최후였다.

현재 아랍권 지도자 중에서는 거센 퇴진 압박 속에 힘겹게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과 알리 압둘라 살레 예멘 대통령이 다음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30년간 집권한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승계받아 11년째 집권중인 아사드는 초강경 시위 진압으로 3천명 이상이 숨졌음에도 권력에 집착하고 있다.

엄청난 희생 속에서도 시위대의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지만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이 의기투합해 공습에 나선 리비아와 달리 서방이 아직 대 시리아 군사작전을 테이블 위에 올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아사드에게는 위안거리다.

더욱이 아사드 대통령의 동생인 마헤르 알-아사드가 정예 부대인 제4사단과 공화국수비대를 이끌며 정권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어 시민들이 무력만으로는 정권붕괴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 사실이다. 또 최근 유엔 안보리의 시리아 관련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중국과 러시아의 존재도 아사드 정권에 `원군'이 되고 있다.

그러나 리비아 작전이 종료된 상황에서 서방의 관심이 시리아로 집중되고, 기세가 오른 시리아 시위대의 저항이 더욱 격화할 경우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33년째 집권 중인 살레 예멘 대통령도 안녕을 장담할 수 없다.

지난 6월 대통령궁 경내에서 폭탄공격에 중화상을 입었던 살레 대통령이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치료를 받고 지난달 말 귀국했을 때만 해도 권력 이양에 대한 희망섞인 전망이 나왔지만 그는 버티기 모드를 유지하고 있다.

살레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예멘 보안군이 강경진압하면서 이번주에만 30여명이 희생되는 등 사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일부 군 부대가 반 정부 세력에 가담하면서 내전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현재로선 처벌 면제를 보장하는 대신 살레가 조기 퇴진하는 것을 골자로 한 걸프협력협의회(GCC)의 중재안에 반 정부세력과 살레가 전격 합의할지 여부가 향후 사태 전개에 중대 변수가 될 전망이다.

`아랍의 봄' 바람이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넘어설지도 관심을 모으는 대목이다.

특히 올초 베이징(北京) 등지에서 소규모 시위가 발생하면서 중국 정부까지 긴장시킨 `변혁'의 동력이 3대 세습을 준비중인 북한에까지 전달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그러나 외부세계를 향한 일반 주민들의 소통로를 차단하고 있는 김정일 정권은 주민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권력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핵무기와 장거리미사일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세계파이낸스 뉴스팀 fn@segyef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