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거인, 박태준 타계]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별세
2011-12-13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13일, 향년 8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박 명예회장은 폐질환이 악화돼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뉴스핌 Newspim] 정탁윤 기자 (tack@newspim.com)
[작은거인, 박태준 타계]
鐵을 숭배한 한국의 카네기
2011-12-13
한국의 카네기로 불린 철강왕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철(鐵)'을 신앙처럼 숭배했다.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전 회장은
“ 신앙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서슴없이 ‘철’이라고 대답한다.
군인의 기와 기업인의 혼을 가진 사람.” 으로 박 명예회장을 호평했다.
1927년 9월 29일(음력) 현재 부산 기장군 장안읍 갯마을에서 태어난 박 명예회장은
일본 와세다대를 중퇴하고 육사(6기)에 입학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생도와 교관으로 만났다.
한평생을 철강인으로 산 그와 절대적 후원자였던 박 전 대통령과의 첫 인연이다.
이후 1961년 집권한 박 대통령은
공업 입국의 달성을 위해 종합제철소 건립을 놓고 고민했고, 적임자로 박 명예회장을 택했다.
생도시절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시절 눈여겨 봤던 박 명예회장에게
종합제철소 건립의 대역사를 맡긴 것이다.
박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로 제철소 건설에 들어갔지만,
어려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이 때 등장한 일화가 저 유명한 ‘우향우’이다.
박 명예회장은
선조들의 피와 땀으로 지어지는 제철소 건설이 실패할 경우
우향후해 동해 바다에 몸을 던지자고 설파했다.
이 같은 박 명예회장의 강한 집념은
1973년 6월 9일 우리나라 최초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흘러나오는 감격으로 이어졌다.
한 달 뒤에는 연간 조강생산능력 103만t의 1기 설비가 성공적으로 완공됐다.
이어 광양만에 세계 최신예 최대 제철소 건설을 성공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영일만과 광양만의 신화`라고 이야기한다.
1981년 2월 18일 조강연산 850만t 규모의 포항4기 설비종합 준공에 이르기까지
포항제철소 건설사업은 규모나 물량, 공사 금액, 기간 등에서 사상 초유의 대역사의 연속이었다.
포스코는 주설비 착공 13년만에
910만t 체제의 대단위 제철소를 세계 에서 가장 저렴한 건설비로,
가장 짧은 기간 내에 완공하는 기록을 세웠다.
특히 1972년 7월 후판공장 가동 이후부터는
조업과 건설을 병행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매기(每期)마다 공기(工期)를 단축해 왔다.
박 명예회장은 25년간의 사장 및 회장 재임기간 중 2100만t을 달성했다.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가 이룩한 800만t 기록을 훌쩍 뛰어 넘은 것이다.
그가 첫 삽을 뜬 포스코는
오늘날 세계 5위, 연간 조강생산량 3540만t에 달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철강사로 성장했다.
박 명예회장이 이룩한 포스코의 신화는
한국 경제의 성장사와도 궤를 같이하고 있다.
연간 조강생산 103만t 규모의 1기 설비로 시작한 포스코는
지난해 조강생산량 3370만t, 매출액 32조5820억원, 영업이익 5조470억원, 순이익 4조2030억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창립 당시 34명의 임직원은 1만7450여명(계약직 포함)으로 늘어났다.
포스코 관계자는
“ '우향우 정신'과 ‘제철보국’의 전통,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도전정신,
책임의식과 완벽주의, 철저한 투명경영, 인간존중의 경영이념은
글로벌 포스코의 정신적 자산으로 지금도 면면히 계승, 발전돼 오고 있다.” 고 말했다.
[뉴스핌 Newspim] 김홍군 기자 (kiluk@newspim.com)
[작은 거인, 박태준 타계]
박태준 명예회장 연보
2011-12-13
1927년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서
박봉관(父)과 김소순(母)의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음력 9월 29일)
1944년 (17세) 일본육사 입교 권유 거부. 와세다대 공대로 진학 결심.
소결로공장에 노력봉사 대원으로 배치, 제철과 초면
1946년 (19세) 와세다대 기계공학과 2년을 마치고 중퇴.
1948년 (21세) 귀국 후 취업 좌절로 칩거하다 부산 국방경비대에 자원.
훈련 중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6기 생도로 선발되어 입교.
제2중대장으로 탄도학을 강의하던 박정희 대위와 초면.
단기과정 수료후 육군소위로 임관(7월 28일), 육군 제1여단 제1연대 소대장으로 부임.
1954년 (27세) 금성화랑무공훈장 받음.
육군대학 수석 졸업.
육사 교무처장 부임, 진해에서 태릉으로 육사이전계획수립.
12월 20일 장옥자와 결혼.
후배 장교 황경노와 만남.
1961년 (34세) 육군본부 경력관리기구 위원으로 근무 중 5∙16 발발, 박정희의 배려로 거사명단에서 빠짐.
5월 16일 아침부터 계엄사령부 요원 근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국가재건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회 상공담당 최고위원 취임.
구라파통상사절단장으로 유럽 초방, 산업실태 시찰.
차녀(유아)출생.
육군준장 진급.
1963년 (36세) 박정희의 정치참여 요청으로 거부하고 미국 유학 준비.
3년(근아)출생, 육군소장으로 예편.
1964년 (37세) 박정희의 강력한 요청으로 미국 유학 포기,
일본 특사로 훗카이도에서 규슈까지 일본 전역 10개월간 순방.
야스오카와 초면.
대한중석 사장으로 발령(12월 8일), 전무 고준식과 재회.
1965년 (38세) 육군 경리장교 황경노, 노중열, 홍건유 등 합류.
대한중석 1년 만에 흑자체제로 전환.
박정희 요청, 일본 최고 제철소 가와사키제철소 견학, 종합제철 프로젝트에 관심.
4녀(경아)출생.
박정희 피츠버그 방문, 코퍼스사 포이 회장과 종합제철 건설에 대한 의사 교환(5월 26일)
1967년 (40세) 정부와 KISA 종합제철소 건설 가협정 조인(4월 6일).
종합제철건설사업추진위원장에 임명, 박정희 ‘제철공장 완수’ 특명.
1968년 (41세)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사명 확정(영문 약자표기 ‘POSCO’) 및
유네스코회관에서 창립식(4월 1일) 개최, 초대 사장 취임.
고준식, 황경노, 노중열, 안병화, 곽증, 장경환 등 대한중석의 인재가 대거 합류.
영일만에 건설사무소(룸멜하우스) 개설.
공장부지조성공사 착수.
사원주택단지 매입 및 건설 착공.
1969년 (42세) 1월 하순 KISA 차관 약속 사실상 무산 확인.
대일청구권 자금 잔여금 포항 1기 건설자금 전용 발상(하와이 구상).
‘3선개헌안 지지성명’ 동조서명 요청거부.
연수원 개원 및 기술자 해외연수 파견.
한일 각료회담에서 종합제철 건설지원 원칙과 대일청구권 자금전용 원칙 합의.
일본조사단 영일만 방문, 종합제철건설 자금조달을 위한 한일기본협약 체결(12월 3일)
1972년 (45세) 영일만의 첫 공장으로 증후판공장 준공(7월 4일),
첫 제품 출하(7월 31일).
포철후판제품 첫 미국 수출.
본사 포항으로 이전(서울은 서울사무소로 존속).
1981년 (54세) 사단법인한일경제협회 회장 피선.
포항4기 설비 종합준공(연산조강 850만 톤 제 확립).
포철 초대 회장 취임(사장 고준식 취임) 포항제철고등학교 개교.
제11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민정당) 비례대표 당선, 국회 재무위원장 피선.
포항 4기 2차 설비착공.
새 정부와의 긴 씨름 끝에 제2제철소 입지를 광양만으로 확정.
브라질 십자대훈장 받음.
호주 마운트∙ 솔리탄광 합작개발 착수.
1990년 (63세) 민정당 대표 취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합당으로 민주자유당(민자당) 출범, 최고위원 취임.
포철 부회장 황경노 취임.
비엔나, 테헤란 사무소 개설.
광양3기 설비 종합준공(연산조강 810만 톤 체제 확립).
프랑스 레종 도뇌르 훈장 받음.
국내 최초 축구전용 잔디구장 포항 준공.
1993년 (66세) 해외 유랑, 도쿄 13평 아파트 생활 시작.
포철 회장 정명식, 사장 조말수 취임 (황경노, 박득표, 이대공, 유상부 등 이른바 ‘TJ파’ 퇴임).
포철 세무조사.
본인, 가족, 친인척, 측근들에 대한 전방위 비자금 조사
1996년 (69세) 총선 앞의 여야 영입제의 거부.
1997년 (70세) 5월초 귀국, 포항 북구 보궐선거 당선.
김영삼 정권의 경제적 실정 중점 비판, 비전 역설.
DJT연대, 자민련 총재 취임,
IMF관리체제의 국가부도 위기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
사보 『쉿물』폐간(통권309호).
베네수엘라 포스벤 합작계약 체결.
2000년 (73세) 자민련 총재 사퇴, 국무총리 취임.
소량의 각혈 시작.
4월 총선의 여권과 자민련 패배.
5월 19일 총리 사임.
신세기통신 지분 SK에 매각.
포항테크노파크 이사회 창립. 포철 민영화 완료(10월 4일)
2001년 (74세) 뉴욕 코넬대학병원에서 폐 밑 물혹 제거수술.
뉴욕에서 9.11테러 현장 목격.
포철 명예회장 재위촉.
2003년 (76세) ‘중국발전연구기금회’ 고문으로 초빙되어
베이징 댜오위타이 ‘2003년 중국발전 고위충논단’에 참석, 중국경제에 대한 연설.
2005년 (78세) 포스코청암재단 확장 설립.
[뉴스핌=정탁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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