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老將)
노장의 사전적 의미는
그저 간단히 '늙은 장수'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싸움의 경험이 많아 군사(軍事)에 밝은 장수'라는 의미가 큽니다.
그리고 광범위하게는 '많은 경험을 쌓아 일에 노련한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영어나 불어로 '베테랑(veteran)'이라는 단어 역시 '참전용사'라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말의 노장과 같은 의미로 종종 사용됩니다.
올 프로야구 시즌 초
기아 타이거즈의 노장 이종범이 돌연 떠밀리듯 은퇴를 하면서 논쟁의 불씨를 제공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 특히 스포츠계는, 예전에 비해 훨씬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노장에 대한 예우나 혹은 활용도가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물론 체력이 떨어지고 기량이 쇠퇴하면 그만 두는 것이 맞지만,
여전히 경쟁력이 있고 활용도가 많음에도
세월에 떠밀려 뒷전으로 밀리고 운동을 그만 두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은퇴의 시점을 잡는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또 그것을 잘못 선택해 낭패를 보기도 하지만.
노장에게 주어지는 기회의 장이 조금 더 넓어졌으면 하는 생각은 늘 듭니다.
< MLB 최고령 승리 투수의 기록을 세운 모미어는
최근 토론토 마이너에서 방출됐지만 도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62년생입니다. >
그런 면에서 제이미 모이어라는 투수의 야구 인생은 대단히 흥미롭고 또 감동적이기도 합니다.
지난 4월18일 콜로라도 로키스의 선발 마운드에 오른 모이어는
쿠어스필드에서 열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경기에서
7이닝 동안 6안타 2실점(비자책)의 호투로 승리 투수가 됐습니다.
시즌 첫 두 번의 등판에서는 승운이 따르지 않더니 마침내 승리를 따냈습니다.
1962년생인 모이어의 그날 나이는 정확히 만 49세 151일이었습니다.
그 승리로 모이어는 메이저리그 역사책을 새로 썼습니다.
종전 최고령 승리 투수의 기록은 잭 크윈의 49세 74일이었으니 77일이 더 많았습니다.
크윈이 이 기록을 세운 것은 1932년 브루클린 다저스 시절이었습니다.
모이어가 태어나기 30년 전의 일이었고 80년 만에 기록이 깨진 것이었습니다.
(모이어에게 애착이 가는 여러 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그의 MLB 데뷔 연도가
기자가 신문에 수습기자로 기사를 쓰기 시작한 1986년으로 같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1986년 시카고 커브스에서 빅리그 투수의 길을 걷기 시작한 모이어는
텍사스와 세인트루이스, 볼티모어를 거쳐 시애틀에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만 38세이던 2001년에는 20승 고지에 올라 대기만성의 전형을 보여주었습니다.
2006시즌 중반 필라델피아로 이적한 후에도 마운드에서 그의 실력은 세월을 비켜갔습니다.
2008년에는 16승을 거뒀고,
자신의 첫 월드시리즈 반지를 끼는데 일조했습니다.
지난 2010년 5월 8일에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메이저리그 최고령 완봉승(47세170일) 기록도 세웠습니다.
모이어는 MLB 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무려 4번의 10년 주기에 각각 완봉승을 거둔 투수입니다.
즉 198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2000년대에 이어 2010년대에도 완봉승을 거두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속구의 최고 구속이 137km, 평균 구속이 133km 정도였던 모이어는
MLB에서 구속이 가장 느린 투수 랭킹 1,2위를 다툴 정도였지만
그의 투혼과 야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만큼은 어떤 젊은 투수들에게 뒤지지 않았습니다.
2010년 시즌 중반 모이어는 팔꿈치 부상으로 시즌을 접었습니다.
그리고 시즌이 끝나자 방출됐습니다.
48세 노장이 드디어 글러브를 벗고 스파이크를 장식장에 집어넣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외신은 모이어가 자비로 팔꿈치 수술을 받았고 재기를 노릴 것이라는 소식을 타전했습니다.
설마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봄 모이어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스프링 캠프에 나타났습니다.
초청선수 자격으로 아무런 보장 없이 생애 25번째 캠프를 시작했고
결국은 선발 로테이션의 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최고령 승리 투수의 기록을 세운데 이어
지난 5월 22일에는 아마도 절대 깨지지 않을 절묘한 '50-50-50'이라는 진기록도 만들었습니다.
그날 모이어는 마이애미의 말린스파크에서 열린 원정 경기에 선발투수로 나섰는데
투수 사상 최초로 50번째 MLB 구장 마운드에 올랐는데
마침 모이어의 등번호가 50번이었고,
그의 나이 50이었습니다.
기자가 취재를 한 MLB 구장이 39개인데 모이어는 그보다 11개가 많은 구장에서 공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모이어의 시즌은 힘겨웠고
10경기에서 2승5패 평균자책점 5.70의 성적이 나오자 로키스는 방출을 통고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길고 긴 투수 인생이 끝난다고 여겼지만 모이어는 다시 볼티모어와 마이너 계약을 맺습니다.
3경기 조건부로 나서 16이닝 3실점 16K의 실력 발휘를 했지만 빅리그에 빈자리가 없었습니다.
미련 없이 떠난 모이어는 토론토와 비슷한 계약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 경기에서 실력 발휘가 안 됐고 7월 15일 다시 무적 선수가 됐습니다.
아마도 이제는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난 2008년 10월 월드시리즈 취재 당시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아직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20년 넘게 성공적인 투수로 활약하는 원동력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 물론 투수가 내겐 일이지만 나는 그것을 즐기고 있다.
매일 매일이 새로운 도전이다.
그리고 던질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그것이 더욱 소중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50대에도 효과적인 피칭을 할 수 있다고 보는지.'라는 질문에
당시 만 45세이던 모이어는
" 글쎄, 잘 모르겠다.
아직 50이 안 돼봤으니까.(웃음)
50대까지 던진 투수는 한 명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러니까 많은 선수들이 습관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아니다.
45세까지는 너무 즐거웠다.
그리고 아직도 선수 생활을 하고 있고, 포스트 시즌에도 왔다.
그러나 50이면 아직 5년이 남았다.
5년이면 긴 세월이지만 또 40살 때나 35살 때를 돌아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만약 35세에 누군가가 내게 40세까지 투수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면 내 대답은 아마 'NO'였을 것이다.
40세에 45세까지 할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받았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는 한번 두고 보자."
그리고 모이어는 오늘까지 왔습니다.
최근 기자회견에서도 모이어는 야구를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다고 했습니다.
팀의 승리에 기여할 수만 있다면 계속 마운드에 오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269승을 거둔 모이어의 마지막 행보가 어찌 될지 궁금합니다.
< 수많은 신화를 남긴 페이지는 59세에 MLB 마운드에 오른 기록을 남겼습니다. >
그런데 모이어가 50대까지 던진 투수가 한 명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한 그 투수는
바로 세첼 페이지(Satchel Paige)입니다.
니그로리그의 전설이던 페이지가 1948년 8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유니폼을 입고 데뷔하던 날
7만8000명의 관중이 운집했다고 합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치열한 페넌트 레이스 때문이기도 했지만
42세 루키의 데뷔전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192cm의 큰 키에 몸무게는 80kg를 겨우 넘길 정도로 깡마른 체구의 페이지는
당대 선수들의 증언에 의하면 역사상 가장 빠른 공을 던졌고,
마운드에서 포수의 미트에 앉은 파리를 맞힐 정도로 발군의 제구력을 지녔다고 했습니다.
2년간 MLB에서 뛰다가 니그로리그도 돌아가기도 했던 페이지는
45세이던 1951년 시즌 중간부터 다시 MLB로 복귀해 세 시즌동안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서 뛰었습니다.
그리고 1965년 호적상 59세의 나이에 페이지는
캔자스시티 어슬레틱스의 유니폼을 입고 한 게임에 등판해
보스턴 레드삭스를 3이닝 1안타 무실점으로 막은 기록도 있습니다.
그의 은퇴 경기였는데 모이어도 이 최고령 등판 기록만은 깨지 못할 것입니다.
당시 그는 해설가로 활동했는데
투수에게 하도 독설을 퍼붓자
선수들이 그러면직접 던져보라고 비아냥대자
진짜 마운드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 니그로리그에서 뛴 페이지는 전설 그 자체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니그로리그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데
많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통산 약 2600게임을 던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1년 내내 벌어지던 리그에서는 한 시즌 200게임 이상을 던진 적도 몇 차례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페이지가 통산 1000승을 훨씬 넘게 거뒀다는 이야기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보는 야구 역사가들도 많습니다.
한 시즌에 104승1패를 기록했다는 증언도 있고,
그의 생애 통산 승수는 2000승이 넘는다는 주장도 나올 정도입니다.
또한 페이지가 적게는 50번에서 많게는 100번 이 넘는 노히트 게임을 기록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만 42세부터 뛴 메이저리그의 성적을 보면
179게임에서 28승31패 32세이브, 평균자책점이 3.29였습니다.
선발로 뛴 경기가 26번에 불과했고, 주로 구원 투수로 뛰었다는데,
40대 중반에 이런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면
20~30대에 그가 어떤 투수였을지는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9회 마지막 수비 때면 외야수들까지 모두 불러 앉혀 놓고
세 타자를 차례로 삼진 잡는 것을 지켜보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 다저스 트리플A를 거쳐 다시 돌아온 최향남은
프로야구 최고령 세이브를 기록하며 역사를 새로 쓰고 있습니다. >
모이어와 페이지를 거쳐 우리에겐 요즘 최향남이 있습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테스트를 거쳐 다시 기아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더니
최근 마무리 투수로 위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25일 최향남은
광주 넥센전에서 3-1로 앞선 9회말 등판해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만 41세3개월27일의 최고령 세이브 기록을 세웠습니다.
종전기록은 2007년 송진우(한화 코치)가 세운 만 41세3개월15일로 12일이 많은 최고 기록이 됐습니다.
2008년 롯데 마무리를 하던 그가 돌연 사라진 것은 버릴 수 없던 꿈인 MLB 도전을 위해서였습니다.
2009년 LA 다저스 트리플A에서 뛴 최향남은 눈부신 성적을 올렸습니다.
33경기에 등판해 9승2패에 2.34의 평균자책점. 57.2이닝 동안에 무려 77개의 삼진을 잡았습니다.
만약 그가 만 38세의 동양에서 테스트를 받고 입단한 무명 노장이 아니었더라면
분명히 MLB의 기회가 주어졌을 것입니다.
결국 최향남은 2011년 트리플A를 거쳐 일본 독립리그에도 갔다가
마지막 테스트 경기에서 홈런을 두 방 맞고 일본 프로팀과 계약이 무산된 후 귀국했습니다.
지난겨울 제주도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변함없이 운동과 훈련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SK 입단설이 있었지만
최영필이 와이번스와 계약하면서 여전히 최향남은 무적 선수로 홀로 운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6월 타이거즈 입단 테스트를 통과하며 다시 프로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최고 구속 141km에 평균 130km대 중반의 속구와 슬라이더를 앞세워
리그 최고 타자들을 농락하고 있습니다.
구속이 빠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조만간 밑천이 드러날 것이라는 회의론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향남은 자신만의 투구 밸런스와 템포,
그리고 믿기 어려운 투혼으로 무장하고 마운드에 오릅니다.
최향남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 확실히 세이브 상황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게 느껴진다.
다른 선수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오히려 그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전투모드도 더 활성화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라고 했습니다.
노장의 투혼이 느껴집니다.
최향남은 자신의 구속이 더 빨라질 것이라고도 했다.
늘 8월말에서 9월초가 되면 근육이 더 견고해져 강한 볼을 던질 수 있게 됐었다며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최향남을 보면 몸과 팔로뿐 아니라 마음으로 공을 던지는 법을 터득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송진우(46·한화 투수코치)가 2009년 4월8일 대전 두산전에서 세운
43세 1개월 23일이 최고령 승리 기록을 언급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그러나 1971년 3월28일생 만 41세 4개월의 최향남은 또 다른 노장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 이 기사는 더그아웃 매가진에도 실린 것을 보충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