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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 04. 08 ]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타계

leekejh 2013. 4. 9. 10:24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타계

 
연합뉴스   2103. 04. 08
 
 
대처 전 영국 총리(AP=연합뉴스, 자료사진)
대처 전 영국 총리(AP=연합뉴스, 자료사진)

"위대한 영국인을 잃었다"…영국 여왕, 총리 애도

영국 정부 "장례는 다이애나비 때 수준으로 치를 것"

(런던=연합뉴스) 김태한 특파원 = 마거릿 대처(87) 전 영국 총리가 8일(현지시간) 오전 뇌졸중으로 숨졌다.

대처 전 총리의 대변인인 팀 벨 경은 "대처 전 총리가 오늘 아침 뇌졸중으로 운명했다고 가족들이 밝혔다"며 "이런 소식을 전하게 돼 매우 슬프다"고 말했다.

벨 경은 스카이뉴스를 통해 "이제 그를 다시 볼 수 없게 됐다"며 "대처는 영국의 가장 훌륭한 총리 중 한 명이었다"고 평가했다.

또 "대처는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자신을 바쳤으며 영국을 사랑했다"고 덧붙였다.

영국 왕실은 이날 비보에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크게 슬퍼했으며, 유족에게 위로의 뜻을 전달했다고 발표했다.

대처 전 영국총리
대처 전 영국총리
지난 2009년 11월23일 고든 브라운 당시 영국 총리(맨 오른쪽)와 함께 한 대처 전 총리(AFP=연합뉴스, 자료사진)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위대한 지도자이자 위대한 총리, 위대한 영국인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영국 정부는 대처 총리의 장례 절차는 본인의 유언에 따라 국장으로 치르지는 않지만, 과거 여왕의 모친과 다이애나비 장례 때와 같은 수준에서 준비키로 했다고 밝혔다.

존 메이저 전 총리는 "고인은 경제 개혁과 포클랜드 전쟁 승리 등 다른 지도자들이 이루지 못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며 "진정한 힘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회고했다.

야당인 노동당의 에드 밀리밴드 당수는 "대처 전 총리는 노선은 달랐지만 전 세대에 걸쳐 영국의 정치를 바꾼 특출한 지도자였다"고 조의를 전했다.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를 지낸 대처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세 차례나 총선을 승리로 이끌며 '철의 여인'으로 불렸다.

노동당 내각이 의회에서 불신임결의를 당하고 해산된 직후인 1979년 총선에서 승리함으로써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에 취임하였다.

<그래픽>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연보(종합)
<그래픽>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연보(종합)
(서울=연합뉴스) 박영석 기자 = 마거릿 대처(87) 전 영국 총리가 8일(현지시간) 오전 뇌졸중으로 숨졌다. 대처 전 총리의 대변인인 팀 벨 경은 "대처 전 총리가 오늘 아침 뇌졸중으로 운명했다고 가족들이 밝혔다"며 "이런 소식을 전하게 돼 매우 슬프다"고 말했다. zeroground@yna.co.kr @yonhap_graphics(트위터)
 
집권 후 긴축재정을 실시해 영국의 경제 부흥을 이끌고, 1982년에는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포클랜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정치적 역량을 과시했다.

과감한 사유화와 노조의 와해, 교육·의료 등 공공분야에 대한 대폭적인 국고지원 삭감 등 획기적인 정책을 추진한 '대처리즘'으로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독단적인 정책 운용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90년 유럽통합에 반대하다가 당 지도부의 반발에 부닥쳐 자진 사임했으며 1991년 5월 정계를 은퇴했다.

1992년 남작 작위를 받고 상원의원으로 활동을 재개했으나 10여 년 전 뇌졸중 증세로 대외 활동을 자제해왔으며 지난해에는 방광 질환으로 수술을 받기도 했다.

th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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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료품집 딸에서 11년 최장수 총리로…‘영국병’ 고친 여걸

英 보수 아이콘 마거릿 대처

 

 

서울신문 | 입력 2013.04.09

 

 

[서울신문]8일(현지시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난 마거릿 대처(87) 전 영국 총리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보수당을 이끌며 '철의 여인'으로 불린 영국의 대표적인 지도자다.

대처 전 총리는 1925년 영국 중서부 랭커셔주 그랜섬에서 보수적인 감리교 집안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식료품점을 운영했던 아버지 앨프리드 로버츠는 학력은 짧았으나 성실히 일해 사업을 번창시켰으며, 대처가 두 살 때 시의원에 당선된 이래 그랜섬의 시장 자리까지 올랐다. 대처 전 총리가 여성이라는 단점을 극복하고 장관을 거쳐 총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이러한 성실함과 책임감 덕분이었다.

대처 전 총리는 옥스퍼드대학의 서머빌 칼리지에서 법학과 화학을 공부했다. 1950년 여성 후보로 최초로 총선에 출마했으나 떨어졌다. 하지만 11살 연상의 기업인인 남편 데니스 대처를 만나 쌍둥이 남매를 낳은 뒤 금전적인 도움에 힘입어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에 접어들었다. 1959년 보수당 소속으로 처음 하원의원에 당선됐을 때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1961~1964년 연금·국민보험부 차관을 지냈고 교육 장관을 거쳐 1969년에 과학장관까지 역임했다. 1975년에는 보수당 대표인 히스를 물리치고 영국 최초의 여성 야당 당수가 됐다. 이후 1987년 총선거 때까지 세 차례 연임에 성공하며 영국 사상 최장수 총리가 됐다.

대처 전 총리는 총리 취임사에서 "문제는 사회주의적 병폐"라면서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11년 재임 기간에 전후 복지 자본주의 모델인 '케인스주의'와 결별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과감하게 밀어붙여 당시 영국 내 만연했던 나태함을 버리고 '영국병'으로 불리던 고질적인 문제를 치유해 영국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때문에 동시대 정치적·역사적 친구로 '레이거 노믹스'라는 용어를 남긴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시장자유주의의 효시로 불린다.

취임 당시 장기 불황에 빠진 영국 경제를 강인한 지도력으로 회생시켰으며 과감한 민영화와 교육·의료 부분에 대한 복지 지출 삭감을 통해 1980년대 초 치솟던 인플레도 잡았다. 특히 경쟁력이 떨어진 공기업은 과감히 민영화하고 대대적인 탄광 노조의 파업을 강경 진압하면서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통치철학을 가리켜 '대처리즘'이라는 단어도 생겨날 정도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지만 한편으로는 실업자를 양산하고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반공주의와 함께 '강한 영국'을 표방했다. 1982년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영웅으로 떠올랐다. 당시 영국 사회는 전쟁 찬반론으로 양분됐으나 "타국의 무력 침공은 영국의 주권을 침해했기 때문에 명예와 주권을 위해서라도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 해군 기동부대를 파견해 두 달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외교적으로는 레이건과 함께 옛 소련에 대해 '힘에 의한 평화'를 주장하며 강력히 대응해 냉전의 종식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반면 1983년에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미국 크루즈 미사일을 배치하고, 1986년에는 리비아 폭격을 위해 미군 전투기의 영국 공군기지 사용을 허가하면서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원수로부터 '피의 보복' 위협을 받기도 했다. 이 같은 대처의 외교 노선에 대해 '미국의 푸들'이라는 조소도 있었다.

하지만 1990년에는 물가 상승률이 10%에 육박하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이 한계를 드러냈고, 새로 출범한 유럽 통합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당의 반발에 부딪혀 1990년 11월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미국 윌리엄메리대 총장과 필립 모리스 고문 등을 지냈다. 2002년 가벼운 뇌졸중을 겪은 이후 기력이 쇠약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남편 데니스 경은 2003년에 사망했다. 건강이 나빠진 이후로는 공식 석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다가 뇌졸중으로 끝내 숨을 거뒀다.

대처 전 총리의 사망 소식에 각국에서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버락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날 성명에서 "대처 전 총리의 서거로 전세계는 위대한 자유의 투사를 잃었고 미국은 진정한 친구를 잃었다"고 애도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대처는 대단한 총리였다. 그녀는 뚜렷한 의견을 가진 훌륭한 여성이었다. 지난 수십년간 그녀를 알고 지낸 사람들은 그녀가 대중들이 생각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재헌 기자 goseoul@seoul.co.kr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철의 여인’ 대처에 관한 5가지 오해

국민일보 | 입력 2013.04.09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영국 총리에 대한 다섯 가지 오해를 보도했다.

①철의 여인은 절대 굽히지 않는다.

이는 거짓이다. 대처는 겉으로는 비타협적이라는 입장을 내세웠으나 이면으로는 협상과 타협에 힘쓰기도 했다. 1981년 탄광노조와 정면대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온건파 노조와 제휴했다. 아일랜드공화국군(IRA)과의 갈등에서도 겉으로는 강경책, 속으로는 유화책으로 대응했다. IRA의 단식투쟁을 냉혹하게 외면하여 10명이 굶어죽는 사태를 빚기도 했지만 1985년에는 이들과 타협하여 영국 정부 최초로 '북아일랜드 협정'을 맺었다.

②대처는 고지식하고 촌스럽고 도덕적이다.

모두 진실은 아니다. 많은 동료들이 그녀에게 유머 감각이 있었다고 전한다. 영국 총리 관저인 '다우닝 10번가'에 술에 취해 나타난 적도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나타나 신발을 벗어던지며 "젠틀맨들이여, 문제를 당장 해결 합시다"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③대처는 유럽 공동체에 반대했다.

그렇다. 그는 유럽 연합(EU) 강화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독특한 점은 대처의 경력에서 읽을 수 있다. 대처는 1975년 영국이 유럽 공동시장에 남을지 여부를 결정하는 총투표에서 '예스 투표' 운동을 벌였다. 다만 대처는 신자유주의자답게 공동시장에는 원칙적으로 찬성했지만, 영국이 당시 유럽공동체에 가입하면 득보다 실이 많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반유럽' 정책을 취했고, 이는 다른 유럽 국가들의 반발과 보복을 불러왔다.

④대처가 권력을 장악하면 누구도 영국에 간섭할 수 없다.

대처가 있는 한 누구도 영국을 건드릴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1986년 리비아 폭격을 위해 미군 폭격기의 영국 공격기지 사용을 허가하면서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에게 '피의 보복' 위협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노선은 '미국의 푸들'이라는 조소를 받았다.

대처리즘은 글로벌 재정 위기를 야기했다.

대처리즘은 가장 명과 암이 공존하는 개념이다. 대처리즘은 영국병을 국가 위기로 진단하고 국가 전체를 개혁 대상으로 삼으며, 노조와의 정면 승부를 통해 기업이 일하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는 취지다. 그러나 영국 성장률이 1990년 0.8%로 떨어지며 대처리즘에 대한 회의가 확산됐다. 그러나 영국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기초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

마거릿 대처 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