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행/한번쯤 가보고 싶다 (국내)

‘겨울풍경이 아름다운 간이역’

leekejh 2012. 1. 11. 23:58

 

           눈덮인 역사 앞, 그리운 사람이 기다릴 것만 같은
 
                                  … ‘겨울풍경이 아름다운 간이역’

 

                                                                                                         국민일보 2012. 01. 11

 

 

오고 가는 나그네들의 쉼표와 느낌표만 있을 뿐 간이역에는 마침표가 없다.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고 그리움과 향수가 묻어나는 추억의 간이역은 시골 고향집처럼 항상 그곳에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동차가 넘쳐나고 시속 300㎞로 달리는 KTX에 존재감마저 희미해졌지만 간이역에 가면 그리운 사람과 그리운 사랑을 만날 것만 같다. 겨울풍경이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어본다.

 

 

 

 

영동선 정동진역 (강원 강릉시)

서울 광화문의 정동쪽에 위치한 정동진역은 1997년 이전까지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바닷가 간이역이었다. 그러나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주인공 혜련(고현정)이 사복경찰에게 잡혀가는 인상적인 장면이 전파를 타면서 주말에는 수천 명이 찾는 관광명소로 부상했다.

정동진역은 우리나라에서 해변과 가장 가까운 간이역으로 영동선 철로와 7번 국도, 그리고 해풍에 비스듬히 누운 '고현정 소나무'가 트레이드마크. 역사 주변에 펜션, 모텔, 음식점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 호젓한 맛은 없어졌지만 플랫폼에서 해변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가슴이 뻥 뚫린다.

어화들이 둥둥 떠 있는 수평선에서 연출하는 해돋이는 정동진을 대표하는 풍경. 서울과 부산 등에서 밤을 새워 달려온 기차와 관광버스가 승객들을 토해내는 새벽에는 좁은 역사와 플랫폼은 물론 해변까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빈다.

모래시계 공원과 정동진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영인정, 산 위에 배 형태로 들어선 선크루즈호텔과 정동진참소리박물관 등 볼거리가 많다. 정동진행 열차는 청량리역, 동대구역, 부전역, 영주역 등에서 출발한다. 주말에는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 11차례 왕복 운행한다. 청량리역에서 정동진역까지 약 6시간(정동진역 033-520-2523).

태백선 추전역 (강원 태백시)

함백산(1573m) 중턱에 위치한 추전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기차역으로 싸리나무가 많아 추전(杻田)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해발 855m에 자리하고 있지만 매봉산 등 주변에 해발 1300m가 넘는 산들에 둘러싸여 오히려 아늑한 골짜기처럼 느껴진다.

추전역은 태백선의 여느 역처럼 석탄을 수송하기 위해 1973년에 생겨났다. 찾는 사람이 드문데다 석탄산업 쇠퇴로 더욱 고립돼 현재는 열차가 정차하지 않는다. 겨울에 부정기 관광열차인 눈꽃열차가 잠시 들르지만 기념사진 한 장 찍을 시간밖에 정차하지 않아 갈수록 외로움을 타고 있다.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면 고한역을 지나자마자 함백산을 관통하는 4505m 길이의 정암터널을 통과한다. 추전역에서 정암터널까지는 오르막이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기찻길은 정암터널 내부에 있는 셈이다. 타고 내리는 승객이 없어 대합실도 사라진 추전역에는 이따금 자동차를 타고 찾아오는 여행객들을 위해 방명록이 비치돼 있다.

추전역과 가까운 용연동굴은 해발 920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지하세계. 동굴 내에는 종유관, 종유석, 석순, 유석, 동굴산호 등 다양한 종류의 동굴생성물이 성장하고 있다. 태백역에서 추전역까지 약 6㎞로 자동차로 15분 소요(추전역 033-553-8550).

정선선 아우라지역 (강원 정선군)

'아리랑의 고장' 정선은 우리나라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오지다. 요즘은 도로가 포장되고 험한 고갯길 아래로 터널이 뚫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찾아가기 힘든 산골이다. 태백선 민둥산역에서 갈라져 나와 아우라지역까지 이어지는 38.7㎞의 정선선도 무연탄을 수송하기 위해 놓인 철도다.

아우라지역은 정선선 열차의 종착역이자 정선 레일바이크의 종착역. 레일바이크는 구절리역에서 출발해 아우라지역까지 운행된다. 아우라지는 두 개 이상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을 일컫는 순 우리말. 마을 이름을 따서 여량역이라 불렸으나 2001년 아우라지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아우라지역 앞을 흐르는 강줄기는 조양강. 송천과 골지천이라는 두 물줄기가 만나 동강의 상류를 이룬다. 하류로 가면서 몇 개의 물줄기가 더 합쳐져 동강이 되고 다시 한강으로 흘러든다. 조선시대에는 주변 산에서 벌목한 목재를 뗏목으로 엮어 한양까지 운반했다고 한다.

송천과 골지천이 합류하는 절벽 아래에는 여송정이라는 정자와 함께 아우라지 처녀상이 서 있다. 시집가는 날 강을 건너다 나룻배가 뒤집혀 세상을 떠난 한 많은 여인의 상이라는 설이 전해온다. 겨울에는 강을 건너는 섶다리가 놓여 운치를 더한다. 민둥산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 3차례 왕복 운행한다(민둥산역 033-591-1069).

영동선 승부역 (경북 봉화군)

첩첩산중 산골역인 승부역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십수 년 전 환상선눈꽃열차가 운행되면서부터. 겨울 나그네들을 위해 눈꽃열차가 하루 1∼3회 정차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하루 4번 왕래하는 무궁화호가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역할을 한다.

승부역이 시나 기행문의 단골 소재로 유명해진 것은 '승부역은 하늘도 세 평이요 꽃밭도 세 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백이다'는 짧은 글 때문. 1962년 이곳에 부임해 19년 동안 역무원으로 일하다 정년퇴직한 김찬빈씨가 역사 옆 화단 바위벽에 흰 페인트로 한 편의 시를 써놓았다.

터널과 승부역 사이에 위치한 역마을 동구에는 '영암선 개통비'가 우뚝 서 있다. 1955년 12월 개통한 영암선은 강원도 석탄을 수송하기 위해 영주에서 철암까지 87㎞ 구간에 33개 터널과 55개 교량을 세운 그 시절 최대의 역사. 순수 우리기술로 건설한 영암선 구간 중 가장 힘들었던 승부역에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을 받아 개통비를 세운 것이다.

승부역 맞은편의 비룡산 산자락에는 한겨울에 눈꽃열차 승객들을 위해 먹거리촌이 들어선다. 양미리와 꼬치를 굽는 구수한 냄새와 연기가 계곡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낙동강을 막아 만든 얼음썰매장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썰매가 마련돼 있다. 승부역에서 석포역까지 낙동강을 따라 가는 12㎞ 구간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문화생태탐방로(석포역 054-672-6788).


글·사진=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