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후!스포츠] 2012년 02월 20일(월)
봅 주크는 메이저리그에서 40년간 수많은 강타자를 발굴한 것으로 명성을 떨친 스카우트였습니다. 명예의 전당 멤버인 윌리 스타젤과 레지 잭슨도 주크가 찾아낸 보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불같은 성격에 거침없는 언행과 선수 스카우트를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위로 물의를 일으킨 적도 많았습니다.
어린 선수를 꿰뚫어보는 능력에도 수차례나 해고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다른 스카우트의 시야를 고의로 방해하기도 했고, 계약서를 위조해 흑인 선수에게 백인 선수와 똑같은 계약금을 받게 하기도 했습니다. 괴팍했지만 소신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몬트리올에서 데뷔한 카터는
'Kid, 어린이'라는 애칭으로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고,
포수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습니다.
1970년대 초 이미 몇 차례 해고된 그는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캘리포니아 스카우트로 고용돼 또 하나 야구계에서 잊히지 않는 일화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LA 인근 플러튼의 서니힐스 고교에는 유명한 스포츠 스타가 있었습니다. 야구와 풋볼은 발군이었고 농구 실력도 뛰어났습니다. 잘생긴 백인에 지역 최고 스타였던 그는 당연히 대학과 프로의 뜨거운 눈길을 받았습니다. 그 소년의 이름은 개리 카터였습니다.
그런데 1972년 졸업을 앞두고 카터는 무릎을 다쳤습니다. 그럼에도 UCLA를 비롯해 100개 가까운 대학에서 그를 풋볼 쿼터백으로 데려가겠다며 장학금을 약속했습니다. MLB 스카우트들은 과연 무릎을 다친 그가 야구선수로 얼마나 성장할지, 그리고 무엇보다 대학의 물량 공세를 뚫고 그와 계약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주크는 가장 앞장서서 카터와의 계약은 불가능하며 그가 야구에 대한 정열이나 리더십, 열기가 부족하다고 떠들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모두 거짓말이었습니다. 주크는 카터가 13세부터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주크는 자신이 카터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다른 스카우트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열심히 위장하고 다녔습니다. 운동장 멀리 차를 세워놓고 망원경으로 카터의 경기를 관찰하거나 숲속이나 나무 위에 숨어서 경기를 보기도 했습니다. 깨어있는 내내 입에 물고 다니던 시가도 그 때만큼은 피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스카우트는 이미 카터를 포기해 경기장에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철저하게 위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1972년초 캘리포니아 주 고교 야구 올스타전에 가던 그는 갑자기 차를 돌려 지역의 한 고등학교 경기를 보러 갔습니다. 그는 몇 년 전 인터뷰에서 ‘고속도로를 지나가 우연히 야구장 불빛이 보여 잠깐 보러갔는데 그 경기에서 정말 우연히도 카터가 우익수를 보고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메리지 파크’라는 그 경기장은 고속도로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스카우트는 올스타전을 관전하러 갔음은 물론입니다.
그 경기에서 우익수로 나선 카터는 밀어서 우중간 장타를 터뜨리고 강하고 정확한 어깨로 2루에서 주자를 잡는 등 인상적인 플레이를 펼쳤습니다. 주크는 몬트리올 구단에 강력하게 카터의 드래프트를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고교에서 주로 내야수와 가끔 외야수를 보던 카터를 주크는 포수로 추천했습니다. 그는 카터가 홈런 파워에 강한 어깨, 스피드와 민첩성, 그리고 수비력까지 모두 갖춘 ‘5툴 포수’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엑스포스는 1972년 드래프트에서 카터를 3라운드에 유격수로 지명했고, 어떻게 설득했는지 모르지만 주크는 이틀도 안 돼 카터가 UCLA 장학금을 포기하고 프로야구를 선택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카터는 주크가 스카우트한 3번째 명예의 전당 선수가 됐습니다. 스카우트에게 한 명의 명예의 전당 선수가 나와도 경사인데 3명이라니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카터도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행사 연설에서 주크에 대한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주크는 지난 2005년 세상을 떠났고, 카터도 며칠 전 그를 만나러 먼 여행을 떠났습니다.
개리 에드먼드 카터는 1954년 4월 8일 LA 인근 컬버 시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비행기 정비사였고 어머니는 그가 12세 때 폐렴을 돌아가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스포츠에 발군이었던 그는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시작으로 무려 21년간 메이저리그에서 뛰었습니다. 엑스포스는 프로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그를 포수로 바꿨습니다. 첫 프로 캠프에서 선배들은 그를 ‘Kid’ 즉 ‘어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달리기에서 꼭 이기려 들고, 타격 연습 때는 모든 공을 담장을 넘기려고 기를 쓰는 그의 모습은 딱 야구에 미친 어린애의 모습이었습니다. ‘윤석민 어린이’에 앞서 ‘개리 카터 어린이’가 있었던 셈입니다.
그의 야구에 대한 끝없는 열정과 늘 활달하고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모습, 모든 플레이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스타일을 기억하는 팬들은 그가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쉰이 되도 여전히 ‘키드’라는 애칭으로 불렀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야구장에서 그는 영원히 어린이였습니다.

카터가 뇌종양으로 사망하자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은 메츠에서 그의 활약을 기리며
팀의 상징인 오렌지와 블루로 등을 밝혀 고인을 추모했습니다.
프로 2년 만에 카터는 메이저리그로 승격됐고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포수가 홈런도 치고 중심 타선을 이끄는 카리스마를 뽐냈습니다. 포수는 수비에 치중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는데 그는 수비와 공격을 모두 갖춘 전천후 포수였습니다. 1974년 프로 2년차 때 트리플A에서 23홈런에 87타점을 올렸고, 9월에 처음 빅리그에 승격돼서는 4할7리를 기록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빅리그 첫 홈런은 그 가을 필리스 에이스 스티브 칼턴에게 뽑았습니다. 조니 벤치 이후 최고의 완벽한 포수가 탄생했다고 야단이었습니다.
빅리그 첫 해에 포수와 우익수를 번갈아 본 카터는 올스타에 선정됐고 2할7푼에 17홈런 68타점으로 신인왕 투표에서 2위에 올랐습니다. 그 후 카터는 몬트리올의 주전 포수로 자리를 잡으면서 한 시즌 30홈런-100타점을 달성할 수 있는 거포로 성장했습니다.
카터는 상복도 많은 선수였습니다. 큰 경기에 아주 강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올스타 선발 포수로 뽑힌 1981년에는 홈런 2개를 치며 MVP에 뽑혔습니다. 올스타 11번, 골드글러브 3번, 실러슬러거 5번, 올스타전 MVP 2번의 화려한 경력에 1989년에는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몬트리올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 스타로 올라섰지만 그의 야구 생애 하이라이트는 1986년 뉴욕 메츠였습니다. 1984년 시즌이 끝나고 리빌딩에 착수한 몬트리올은 4명의 선수를 받고 카터를 메츠로 트레이드했습니다. 1985년 메츠 데뷔전에서 연장전 결승 홈런을 치며 화려하게 신고한 카터는 32홈런 101타점으로 팀을 98승으로 이끌었지만 NL 동부조 2위에 그치는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 메츠는 기적 같은 월드시리즈 챔피언으로 탄생했고 카터는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몬트리올 시절 유일한 포스트 시즌에서 4할대를 칠 정도로 큰 경기에 항상 강했던 카터는 NLCS 휴스턴과 5차전에서 12회 끝내기 안타를 쳤고,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월드시리즈 6차전에서 10회 안타로 기적의 역전승을 끌어내는 선봉에 섰습니다. 그는 월드시리즈에서 9타점을 올렸고, 지금도 유일하게 월드시리즈와 올스타전에게 각각 한 경기 2홈런을 친 타자로 남아있습니다.
카터는 메츠 사상 3명뿐인 캡틴이었고 엑스포스는 그의 백넘버 8번을 영구 결번으로 기념했습니다.
엑스포스와 메츠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LA 다저스에서 각각 1년씩을 보낸 카터는 1992년 친정 몬트리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합니다.
19년간 2295경기를 뛰었고 그 중에 2056경기에서 포수 마스크를 썼습니다. 2092안타에 324홈런을 치고 1225타점을 올렸습니다. 통산 타율은 2할6푼2리였고 포수 수비율은 .991에 포수로 뛰면서 친 298홈런은 역대 6위를 기록했습니다.
은퇴 후 플로리다 말린스 해설자로 일하고 영화도 출연한 그는 마이너리그 지도자로도 활동했습니다. 네 번이나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올해의 감독상도 3번이나 받았습니다. 2003년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때는 고민 끝에 몬트리올 엑스포스 모자를 썼습니다. 그는 빅리그 첫 12년을 보낼 때 성원해준 캐나다 팬에게 감사하며 연설 중 일부를 불어로 하기도 했습니다.
야구 정열의 화신이던 그가 뇌종양으로 사망하면서 찬사와 추모와 좋은 기억에 대한 회고가 이어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현역 시절 카터에 대한 논란도 있었습니다. 늘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고 항상 팀에서 앞장서서 미디어를 접하고, 언제든 팬에게 사인을 하고 운동장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이면에는 이기적이고 유명세를 쫓는다는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총선 후보라도 되는 줄 아나보다는 비아냥거림도 들었습니다.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도 임종이 가까운 아버지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로비를 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아들 카터가 명예의 전당 멤버가 됐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행사가 열리기 전에 작고했습니다. 뉴욕 메츠의 감독직이 빌 때면 늘 자가발전으로 해서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그는 메츠를 우승으로 이끌 수 있는 적임자는 자신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일부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야구에 대한 그의 열정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망하기 정확히 보름 전인 지난 2월2일 카터는 플로리다 주 팜비치의 애틀랜틱 대학 야구팀 개막전에 돌연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종양 치료약으로 얼굴이 퉁퉁 부었고 혼자 걷지를 못해서 골프 카트를 타야했지만 그는 그날 꼭 야구장에 가겠다고 고집했습니다. 작년에 자신이 감독을 맡았던 그 팀의 개막전만은 꼭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알았을 겁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사랑했던 야구장의 녹색 다이아몬드와 그를 반기는 팬과 그를 필요로 하는 선수와의 만남이 이제 마지막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기자석에서 야구를 보다가 너무 기력이 떨어져 결국 경기를 끝까지 못 보고 운동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보름을 더 암과 투쟁하다가 57세의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야구장에서 영원히 어린이였던 개리 카터는 그렇게 우리를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