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 포 츠/아시아 메이저리거

고질라 마쓰이

leekejh 2013. 1. 31. 12:54

 

[김성훈의 X-파일]

마쓰이, 험난했던 뉴욕상륙작전 ①

 

아시아경제 | 이종길 2013. 01. 28

 

2002년 1월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작은 변화를 발표했다. 원정 유니폼 상의에 새겼던 '도쿄(TOKYO)'를 기업명인 '요미우리(YOMIURI)'로 변경했다. 사소한 듯 보이나 이는 적잖은 반발을 초래했다. 반대 입장에 선 건 나머지 11개 구단 관계자나 팬이 아니었다. 주인공은 요미우리 프런트와 팬. 반대를 내비친 까닭은 다음과 같았다.

"요미우리를 응원하는 적잖은 팬들은 요미우리신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팬이 된 건 자이언츠 스타플레이어들에 매료된 까닭이다.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보급되고 일본의 거품경제가 절정으로 치닫던 1960~80년대, 매일 저녁 니혼TV를 통해 중계되던 요미우리 경기는 일본인 삶의 일부였다. 특히 지방 야구팬들은 원정 유니폼에 붙은 도쿄(TOKYO)라는 글자를 보고 도쿄라는 거대도시와 그곳을 연고지로 하는 자이언츠에 동경을 가졌다. 구단은 이런 팬들의 정서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기업명을 내세우려하는 건 전통을 훼손하는 일이다."

비난여론에도 요미우리는 디자인을 변경했다. 일본 정치계 숨은 실력자이자 요미우리신문의 오너 와타나베 츠네오가 강행을 주도했다. 요미우리 선수들은 불만이 있었지만 표출하지 못했다. 와타나베의 절대권력 앞에 그저 눈치를 보기 바빴다. 한 선수만큼은 예외였다.

"도쿄가 새겨진 원정유니폼은 선수단의 전통입니다. 요미우리가 이런 전통을 왜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마쓰이 히데키였다. 발언을 최초 보도한 매체는 놀랍게도 요미우리신문의 기관지인 스포츠호치. 기사를 쓴 기자는 8년째 요미우리 구단을 담당한 히로오카 아사오였다. 와타나베는 격노했지만 뉴욕 특파원 파견에서 사태를 매듭졌다. 마쓰이의 비호에 더한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히로오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대학원 진학을 이유로 사표를 냈다. 현재 그는 마쓰이의 홍보담당 대변인으로 일하고 있다.

과감한 발언만큼 마쓰이는 그해 자신감 넘치게 배트를 휘둘렀다.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전 경기(140경기)에 출장해 타율 3할3푼4리 50홈런 107타점을 기록했다. 그 덕에 요미우리는 2년 만에 저팬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마쓰이는 시즌 뒤인 11월 1일 메이저리그 도전 의사를 나타냈다. 다급해진 요미우리는 5년간 100억 엔이란 파격적 조건을 제시하며 잔류를 제안했다. 하지만 마쓰이의 결심은 단호했다. 12월 19일 뉴욕 양키스로부터 3년간 2100만 달러를 받는 조건에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었다. 뉴욕 언론들은 속속 마쓰이와 관련한 헤드라인을 내걸었다.

'고질라가 브롱스에 온다!(Godzilla Comes to Bronx)'

뉴욕상륙작전

"메이저리그에서도 홈런타자의 면모를 이어가겠다."

2003시즌을 앞둔 마쓰이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출발도 순조로웠다. 4월 8일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미네소타 트윈스와 홈 개막전에서 홈런을 터뜨렸다. 3-1로 앞선 5회 1사 만루에서 상대 선발 조 메이스의 시속 145km 직구를 끌어당겨 우중간 담장을 넘겼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만만한 무대가 아니었다. 마쓰이는 4월과 5월 출장한 55경기에서 타율 2할5푼8리 3홈런 OPS 0.641을 남기는데 머물렀다. 삼진을 당한 건 30차례에 그쳤지만 땅볼 아웃에 발목을 잡혔다. 원인은 몸 쪽 공에 대한 두려움. 투수들의 공은 일본과 판이했다. 직구는 더 빨랐고 변화구의 각은 더 컸다. 더구나 투수들은 일본에서처럼 바깥 코스 위주로 볼을 던지지 않았다. 몸 쪽 승부를 즐겼다. 홈 플레이트에서 자연스레 멀어지게 된 마쓰이는 투 스트라이크 이후 바깥쪽 공에 적잖게 내야땅볼로 물러났다.

이를 지켜보던 조 토레 감독은 홈 플레이트로 가까이 다가가 타격할 것을 주문했다. 마쓰이는 바로 변화를 감행했다. 몸을 15cm가량 타석 안쪽으로 붙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6월 치른 27경기에서 타율 3할9푼4리 6홈런 OPS 1.157의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거포라고 불려 영입했는데 지켜보니 똑딱이더라"라며 비아냥거리던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의 생각을 바꿔 놓을만한 활약. 활약 덕에 마쓰이는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상승곡선은 길지 않았다. 7월부터 9월까지 치른 81경기에서 7개의 홈런을 추가하는데 그쳤다. 시즌 최종성적은 타율 2할8푼7리 16홈런 OPS 0.788. 메이저리그 신인치곤 괜찮은 성적이었지만 일본에서 10년간 타율 3할4리 332홈런 OPS 0.996을 기록했단 점을 감안하면 적잖게 아쉬움이 남는 기록이었다. 그래도 저력을 발휘한 장면은 꽤 있었다. 특히 득점권타율은 3할3푼5리로 팀 내 가장 높았다. 전 경기 출장 기록(163경기)을 세운 그는 그 덕에 타점이 106점에 달했다. 42개의 2루타도 빼놓을 수 없다. 역대 양키스 신인타자 가운데 1936년 조 디마지오(44개)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치를 남겼다. 하지만 뉴욕 매체들은 그의 이름 앞에 '땅볼 왕(Ground Ball King)'이란 수식어를 달았다. 25개의 병살타(아메리칸리그 2위)와 223개의 땅볼 아웃(아메리칸리그 3위)에서 생긴 달갑지 않은 별명이었다.

②편에서 계속

김성훈 해외야구 통신원

이종길 기자 leemean@

 

 

 

마쓰이에 울고 웃은 뉴욕 ②

 

아시아경제 | 이종길 2013. 01. 29

 

다소 혹독한 메이저리그 데뷔 시즌을 보낸 마쓰이 히데키. 오프시즌 초점은 자연스레 파워증강에 맞춰졌다. 엄청난 양의 웨이트트레이닝을 소화했다. 그 사이 체중은 98kg에서 103kg로 늘었다. 특히 상체가 눈에 띄게 커졌다. 그는 타격자세에도 변화를 줬다. 이전까지 양손을 턱밑 높이에 두고 배트를 쥐었는데 위치를 귀 옆까지 가져갔다. 동시에 양발의 스탠스를 넓게 잡아 회전력 증가를 노렸다. 취재진이 물은 시즌 목표에 마쓰이는 "몸 쪽 높은 코스로 들어오는 공을 좌중간 방향으로 밀어 쳐 장타를 늘리겠다"라고 했다.

2004년 3월 31일 도쿄 돔. 템파베이와의 2차전에서 마쓰이는 순조로운 출발을 알렸다. 5회 상대 선발 제레미 곤잘레스를 상대로 우중월 솔로 홈런을 때렸다. 하지만 4월 한 달간 홈런은 2개에 머물렀다. 노력의 결실을 맺은 건 5월부터였다. 한 달간 6개를 치더니 6월에는 7개를 때렸다. 조 토레 감독은 8월 15일 시애틀전과의 원정경기에서 그를 4번 타자에 배치했다. 시즌이 끝날 때까지 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쓰이는 9월 29일 미네소타전에서 30홈런 고지를 정복하더니 이튿날 그랜트 발포어를 두들겨 홈런 하나를 추가했다.

홈런에 집착한 탓일까. 마쓰이의 9월 타율은 2할7푼8리로 떨어졌다. 그래도 시즌 타율은 2할9푼8리였다. 3할 달성은 놓쳤지만 전년도보다 홈런을 2배 가까이 늘렸다. 상승세는 포스트시즌 11경기에서도 이어졌다. 타율 4할1푼2리 3홈런 13타점의 맹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양키스는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보스턴에 역사적인 리버스스윕을 내주며 가을야구를 마감했다. 뉴욕 언론은 들끓었지만 마쓰이를 비난하진 않았다.

한계에 부딪힌 40홈런 꿈

마쓰이는 2004년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오프시즌 파워 증강을 더욱 고민했다. 그 결과 체중은 7kg이 늘어 110kg가 됐다. 2005시즌을 앞두고 그는 "40개 이상의 대형아치로 홈런왕에 오르겠다"라고 다짐했다. 출발은 경쾌했다. 4월 3일 보스턴과의 홈 개막전에서 8회 매트 맨타이를 상대로 마수걸이 홈런을 뽑아내는 등 4경기 3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시즌 4호가 터진 건 그로부터 52일이 지난 5월 31일 캔자스시티전이었다. 마쓰이는 202타석 동안 홈런 갈증에 허덕였다.

6월은 달랐다. 마쓰이는 6월 12일 오른 발목을 접질렸지만 지명타자로 출장을 강행, 한 달 동안 타율 3할9푼8리 6홈런 23타점을 올렸다. 시즌이 끝날 때까지 결장은 없었다. 23홈런에 그쳤지만 3년 연속 전 경기에 출전했다. 메이저리그 데뷔 이래 가장 높은 타율(3할5리)을 남기기도 했다. 116타점도 커리어하이였다. 3년 연속 100타점 고지를 정복하며 뉴요커들에게 '찬스에 강한 타자'란 인상을 심어줬다. 브라이언 캐시먼 단장은 곧 4년 5200만 달러의 연장 계약을 선물하며 성실함과 해결사 능력에 화답했다.

마쓰이는 구단 관계자, 팀 동료, 취재기자 등에게 두루 호평을 받았다. 해결사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양키스는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의 입김이 센 구단이었다. 그는 2001년 선수단이 애리조나에게 월드시리즈 4연패를 저지당하자 "우승이 아니면 죽음을"이라고 외치며 선수를 마구 영입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땐 거침없이 독설을 날렸다. 마쓰이는 스타인브레너의 변덕에 제법 의연하게 대처했다. 내성이 쌓인 덕이었다. 요미우리 시절 그는 스타인브레너보다 더 지독한 와타나베 츠네오 구단주를 경험한 바 있다.

부상에 쓰러진 고질라

성공시대를 열어가던 마쓰이에게 2006년은 적신호가 켜진 해였다. 부상에 자주 발목을 잡혔다. 2005년 다친 오른 발목에 일본 시절부터 앓아온 무릎부상이 재발했다. 마쓰이는 4월 3일 오클랜드와 개막전에서 4타수 4안타를 때리는 등 주위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듯했다. 하지만 5월 11일 홈에서 열린 보스턴전 수비 도중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1회 마크 로레타의 얕은 플라이에 텍사스히트를 막으려고 슬라이딩캐치를 시도했는데 글러브가 잔디에 걸리면서 온 체중이 왼 손목으로 쏠리고 말았다. 손목은 이내 엿가락처럼 구부러졌다.

손목 골절에 마쓰이는 곧 시즌아웃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회복속도는 의외로 빨랐다. 9월 12일 템파베이와 홈경기에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했다. 홈 관중의 기립박수 속에 그는 4안타를 몰아쳤다. 성적은 부상 당시 일었던 장타 실종 비관론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복귀 이후 가진 19경기에서 타율 3할9푼6리 3홈런 OPS 1.062를 기록했다.

2007년 마쓰이는 타율 2할8푼5리 25홈런 103타점을 올리며 재기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잦은 부상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4월 7일 볼티모어전에서 왼 햄스트링 부상을 입었고 시즌 내내 무릎 통증을 호소했다. 그 여파는 수비에서 적잖게 발견됐다. 7월 26일 디트로이트와 원정경기가 대표적이다. 커티스 그랜더슨의 좌익선상 타구를 미숙하게 처리해 그라운드 홈런을 허용했다. 부상은 시즌 막판 타격에도 영향을 미쳤다. 9월 가진 22경기의 타율은 1할8푼5리였다.

결국 마쓰이는 11월 17일 뉴욕 시내 병원에서 오른 무릎연골 제거수술을 받았다. 오프시즌 양키스는 그런 그를 놓고 샌프란시스코, LA 다저스 등과 트레이드 논의를 벌였다. 트레이드 거부권을 가지고 있던 마쓰이는 주저 없이 권리를 행사했다. 무엇보다 양키스는 과한 조건을 제시해 합의점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 요구한 건 팀 린스컴이었다.

마쓰이는 2008년 4월 타율 3할2푼2리, 5월 3할5푼을 치며 '마쓰이의 시대는 갔다'는 세간의 평을 잠재우는 듯했다. 하지만 한 번 입은 부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 6월 18일 이번에는 왼 무릎이 문제로 불거졌다. 불안정한 오른 무릎 상태에서 비롯된 과부하였다. 마쓰이는 왼 무릎에서 물을 빼내고 경기 출장을 강행했지만 열흘 뒤 부상자명단에 올랐다. 회복에 차도가 없자 7월 조 지라디 감독은 수술을 권유했다. 캐시먼 단장까지 나섰지만 마쓰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재활을 선택, 8월 19일 토론토전에서 그라운드에 복귀했다. 정상과 거리가 먼 몸 상태에서 좋은 성적은 나올 리 없었다. 결국 마쓰이는 9월 21일 시즌을 마감, 다음날 또 한 번 수술대에 올랐다.

그해 양키스는 14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대부분의 뉴욕 언론들은 원흉으로 마쓰이를 지목했다. 팬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뉴욕 데일리뉴스가 실시한 책임론 성격의 여론조사에서 마쓰이는 47%의 표를 받았다. 이 같은 분위기를 틈타 시애틀은 양키스에 트레이드를 문의했다. 구체화되는 듯했던 대화는 마쓰이의 거부로 없던 일이 됐다.

③편에서 계속

김성훈 해외야구 통신원

이종길 기자 leemean@

 

 

 

마쓰이, '고질라' 재현 왜 어려웠나 ③

 

 

아시아경제 | 이종길 2013. 01. 30

 

2009시즌을 앞두고 마쓰이 히데키는 무릎 재활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시범경기 출장을 자제하면서까지 컨디션을 끌어올리는데 집중했다. 그해 양키스의 홈은 뉴양키스타디움으로 바뀌었다. 조 지라디 감독은 4월 6일 볼티모어와 역사적인 개장경기에 마쓰이를 4번 타자로 출장시켰다. 마쓰이는 7회 크리스 레이로부터 투런 홈런을 빼앗으며 믿음에 보답했다. 이후 자리는 지명타자로 고정됐다. 지라디 감독은 마쓰이가 수비를 병행할 경우 무릎 부상이 재발할 것이라 여겼다. 한편으론 타격에만 집중해도 제 몫을 해낼 것이라 믿었다.

마쓰이는 그해 142경기에서 타율 2할7푼4리 28홈런 OPS 0.876을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두 번째로 많은 홈런. 하지만 얼굴은 기쁨과 거리가 멀었다. 10월 4일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를 마친 뒤 그는 "부상자명단에 오르지 않고 시즌을 보내 만족스럽다"면서도 "낮은 타율을 반성해야 한다. 28홈런도 칭찬을 받을만한 수치는 아니다"라고 자평했다.

이어진 가을야구에서 마쓰이의 활약은 뜸했다. 미네소타와 디비전시리즈 타율은 2할2푼2리. LA 에인절스와 AL 챔피언십시리즈에서도 배트는 2할3푼8리로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필라델피아와 월드시리즈는 달랐다. 타율 6할1푼5리 3홈런 8타점 OPS 2.027을 기록하며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다. 가장 빛난 건 11월 4일 홈에서 펼쳐진 6차전. 2회 페드로 마르티네즈를 상대로 투런 홈런을 뽑아내더니 3회 2타점 중전안타를 터뜨렸다. 5회에는 J.A 햅에게서 2루타를 빼앗기도 했다. 이날 올린 6타점은 월드시리즈 한 경기 최다 기록과 타이였다. 양키스타디움의 5만여 관중이 그를 향해 "MVP"를 연호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다시 한 번 영웅으로 거듭난 마쓰이. 그는 양키스에서 선수생활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 했다. 구단의 생각은 달랐다. 브라이언 캐시먼 단장은 "앤디 페티트, 쟈니 데이먼 등과의 재계약이 최우선"이라며 결별을 통보했다. 결국 마쓰이는 뉴욕 팬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긴 채 양키스와 인연을 정리했다.

이후 선수인생은 저니맨에 가까웠다. 2010년과 2011년 각각 에인절스와 오클랜드에서 뛰었고, 지난 시즌엔 5월 29일이 돼서야 템파베이 유니폼을 입고 빅 리그에 섰다. 선수단 내 입지는 양키스 때와 판이했다. 앤드류 프리드먼 템파베이 단장은 "주어진 기회는 100타석뿐"이라며 마쓰이를 압박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103타석에서 타율 1할4푼7리 2홈런 OPS 0.435를 남긴 마쓰이는 7월 25일 지명 할당됐다.

거포로 남지 못한 고질라

마쓰이는 메이저리그에서 10년 동안 175홈런을 때렸다. 일본에서 10년 동안 뛰며 기록한 332개의 절반 수준이었다. 마쓰이는 일본에서 정확성과 장타력을 모두 겸비한 선수였다. 타율 3할4리 OPS 0.996의 통산 성적이 이를 말해준다. 일본 역대 최고 포수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후루타 아쓰야는 다음처럼 회고한 바 있다.

"마쓰이의 장점은 파워가 아니다. 타격기술이 빼어나다. 특히 바깥쪽 공을 잡아당겨 오른 담장을 넘기는 능력이 탁월하다. 상대 배터리의 볼 배합을 읽고 게스히팅을 하는데 적중률이 꽤 높은 편이었다."

미국과 일본 기자들이 그간 마쓰이에게 집요하게 물은 질문이 있다.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홈런이 크게 줄어든 이유다. 그때마다 침묵으로 일관했던 마쓰이는 2009년 1월 1일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사히신문이 마련한 우에하라 고지(보스턴)와 신년대담이었다.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나 메이저리그 공인구인 롤링스 공은 일본의 공인구보다 비거리가 나오지 않는다. 바깥쪽 스트라이크존도 일본보다 넓은 편이고. 나는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에 삼진을 당하지 않기 위해 그에 맞는 스윙을 해야 했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능력도 빼놓을 수 없다. 날아드는 공은 일본과 차원이 다르다. 빠른 구속만이 아니다. 변화구의 떨어지는 각도 무척이나 날카롭다. 무엇보다 나는 직구에 애를 먹었다. 똑바로 날아오는 공이 거의 없더라. 공 끝 움직임이 대부분 지저분했다. 다시 말해 처음 보는 공이 무척 많았다. 특히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직구는 무척 치기 어려웠다. 처음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을 때 전년도 사이영상 수상자인 배리 지토를 상대한 적이 있다. 그의 공은 야구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공은 빠르지 않았지만 직구와 변화구(커브) 모두 춤을 췄다."

이 같은 고백은 2009년 11월 아사히TV와 인터뷰와 2011년 11월 스포츠잡지 넘버와 대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홈런이 줄어든 주된 원인은 내가 오른손잡이 왼손타자란 점에 있다. 메이저리그에선 바깥쪽 공 공략을 위해 당겨치기가 필수다. 평소 오른손을 주로 사용하는 나는 왼 손목의 힘이나 활용이 왼손잡이에 비해 떨어진다. 이를 키우려고 웨이트트레이닝을 많이 했다. 식사하는 손도 왼손으로 바꿨고.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바깥쪽 공을 무리하게 끌어당기다 보니 1-2루 사이 땅볼이 많이 나왔다. 결국 2004년부터 바깥쪽 공에 대한 철칙을 세웠다. '칠 수 없는 공은 포기하자'였다. 스윙도 왼팔을 최대한 몸에 붙여서 했다. 레벨스윙에 가까운 스윙 궤적에 땅볼은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잘 맞은 타구가 자주 라인드라이브로 뻗었다. 2~3년차 때 웨이트트레이닝에 몰두한 건 이 때문이었다. 라인드라이브 타구의 비거리를 어떻게든 오른 담장을 넘어갈 만큼 늘리고 싶었다. 그 과정을 겪으며 홈런보다 타점이 더 중요하단 생각을 했다."

"2009시즌 28홈런을 때린 건 그 때가 돼서야 투수들의 볼 배함과 궤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타격스타일도 바꿨었다. 바깥쪽 공을 포기하고 철저하게 몸 쪽 공을 노렸다. 시즌이 중반쯤 되자 상대 수비시프트가 오른쪽으로 이동하더라. 돌이켜보면 2009년이 일본시절과 가장 유사한 타격을 한 것 같다. 무릎 상태가 아쉽긴 했지만. 사실 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많은 홈런을 생산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직구에 대한 몸의 반응이 무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넘어갔다!' 싶은 타구 수가 확실히 적어졌다."

④편에서 계속

김성훈 해외야구 통신원

이종길 기자 leemean@

 

 

마쓰이, 세 갈래 길 앞에 서다 ④

 

 

아시아경제 | 이종길 2013. 01. 31

 

마쓰이 히데키는 지난 12월 28일 뉴욕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선수 은퇴를 공식발표했다. 그라운드를 떠났지만 그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은퇴소식을 접한 와타나베 츠네오 요미우리 회장은 지난 7일 "마쓰이는 하라 다쓰노리의 뒤를 이을 요미우리의 후임감독 감"이라고 말했다. 칭찬은 곧 릴레이로 이어졌다. 오 사다하루 소프트뱅크 호크스 회장, 하라 감독 등이 차례로 바통을 넘겨받았다. 특히 하라 감독은 "선배로서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라고 약속했다. 놀라운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마쓰이가 코치로 요미우리를 찾을 경우 사령탑 자리는 순식간에 위태로워질 수 있다.

칭찬 세례에선 뉴욕 양키스도 빠지지 않았다. 공동구단주인 할 스타인브래너는 지난 12일 은퇴식을 위한 1일 계약을 언급했다.

마쓰이는 세 갈래 길 앞에서 고민하고 있다. 양키스에서의 지도자 수업, 메이저리그 사무국이나 메이저리그 선수노조(MLBPA)에서의 야구행정가 변신, 일본 복귀 등이다.

마쓰이는 우선 와타나베 회장을 비롯한 요미우리 관계자들을 만나 가벼운 대화를 가질 전망이다. 자리에서 요미우리 감독직 제안이 오고갈 가능성은 낮다. 요미우리는 창단 이후 단 한 차례도 다른 구단의 유니폼을 입었던 선수를 감독으로 맞은 적이 없다. 와타나베 회장의 심한 변덕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하라 감독이 선수단을 저팬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상황에서도 취재진에 후임 감독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서슴없이 내놓는 인물이다.

그는 최근 1년 동안 요미우리 차기감독 후보로 세 명을 언급했다. 오치아이 히로미쓰, 스즈키 이치로(뉴욕 양키스), 마쓰이다. 세 후보에겐 공통점이 있다. 요미우리 순혈출신이 아니다. 더구나 와타나베 회장의 꽃놀이패엔 커다란 함정이 있다. 세 후보 모두 요미우리 감독직을 희망한 적이 없단 사실이다.

명예의 전당 헌액?

마쓰이의 은퇴 선언 이후, 미국과 일본 매체 어디에서도 명예의 전당 입회 가능성을 보도한 적은 없다. 그런데 국내 한 매체는 12월 30일 '마쓰이, 명예의 전당 가능성 제기'란 기사를 내놓았다. NBC스포츠의 보도를 인용했다고 밝힌 기사는 마쓰이의 명예의 전당 가능성이 없지 않다며 미국과 일본에서 20년간 뛰며 쌓은 실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미국 내에서 번지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NBC스포츠에서 이 같은 내용이 담긴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NBC스포츠 홈페이지에서 운영하는 블로그 페이지 '하드볼 토크(Haedball Talk)'에 비슷한 내용이 있긴 하다. 마이클 칼카테라란 블로거가 12월 28일 작성한 글이다. 제목은 다음과 같다.

'마쓰이는 명예의 전당 헌액자가 될 수 없다(No, Hideki Matsui is not a Hall of Famer).'

칼카테라는 마쓰이가 일본 프로야구에서 10년 동안 남긴 성적을 더하면 명예의 전당 입회가능성이 있단 주장을 소개한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뛴 적도 있는 로테르토 페타지니를 거론한다. 그의 일본 프로야구 통산 성적이 타율 3할1푼7리 224홈런 598타점 OPS 1.109라며는 점을 예로 들며 마쓰이가 일본 프로야구와 메이저리그의 기록을 합산하면 명예의 전당 후보에 오를 만한 성적이 나온다고 말한다. 페타지니를 예시로 설정한 건 일본 프로야구 기록을 합산하는 것이 그만큼 무의미하단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페타지니가 7시즌(242경기) 동안 남긴 메이저리그 통산 성적은 타율 2할2푼7리 12홈런 54타점에 불과하다.

포스팅 원문 어디에서도 마쓰이의 명예의 전당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부분은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후 국내에서 정정이나 반박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이를 바로잡으려는 분위기조차 없었다. 마쓰이에 대한 국내 시각이 그만큼 강렬했었나 보다.

김성훈 해외야구 통신원

이종길 기자 leem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