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으로 바위 깬 커트 플로드…“선수는 물건이 아니다!”
데일리안 | 2007. 08. 10
1965년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캣피시 헌터(본명: James Augustus Hunter)는 이후 15년 동안 통산 500게임(3449.1이닝)에 등판 224승 166패, 평균자책점 3.26, 탈삼진 2,012개를 기록했다.
1968년 5월 8일 미네소타를 상대로 퍼펙트게임을 달성했던 그는 1971년부터 1975년까지 5시즌 연속 20승 이상을 올렸으며, 1974년에는 25승 12패 평균자책점 2.49와 WHIP(이닝당 출루허용률) 0.986을 기록하며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MLB 최초의 FA 캣피쉬 헌터 ⓒ mlb.com |
이처럼 통산 기록도 훌륭하지만 헌터를 좀 더 특별한 선수로 기억하는 이유는 메이저리그 최초의 자유계약선수(Free Agency)기 때문이다.
1974년 오클랜드의 구단주 찰리 핀리가 약속한 연봉의 절반에 해당하는 보험금을 지불하지 못하자 헌터는 메이저리그 선수회(MLBPA)가 1973년 단체교섭을 통해 이끌어낸 합의에 따라 중재위원회에 이 안건을 상정했고, 중재위원장인 피터 사이츠는 연봉의 절반을 보험금으로 대체하려 한 것이 불공정 거래임을 인정해 헌터를 자유계약선수로 풀어줘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결국 헌터는 1975년 5년 370만 달러라는 사상 최고액의 계약을 통해 뉴욕 양키스로 팀을 옮길 수 있었다. 헌터는 이른바 노예계약이라고도 불리는 보류선수제도로 인해 선수의 생사여탈권을 구단이 쥐고 있던 메이저리그에서 자신의 의사대로 팀을 선택하고 이적을 할 수 있게 된 첫 번째 선수로 남게 됐다.
비운의 도전자 커트 플로드
◇ 비운의 도전자 커트 플로드 ⓒ mlb.com |
1970년 세인트루이스가 12년 동안이나 팀을 위해 뛰어왔던 커트 플로드를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 시키려했다. 이에 플로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팀을 떠나야 한다는 부당한 현실에 분노하며 트레이드를 거부,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법원에 보류선수제도의 부당함을 적극적으로 호소했다.
그러나 당시 보류선수제도는 불법이 아닌 합법적인 제도였기 때문에 그는 소송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 플로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무모한 도전을 하기 위해 선수 생명을 걸었다.
송사로 인해 1970년을 날린 플로드는 1971년 워싱턴 세네토스로 팀을 옮겼지만 그 해 단 7게임에만 출장, 불과 33살의 나이에 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은퇴한 뒤에도 계속해서 사무국과 싸웠다. 하지만 1974년 대법원은 '보류선수제도는 합법적인 제도'라며 구단의 손을 들어줬고, 플로드의 위대한 도전은 그렇게 비극으로 끝났다. 플로드는 "나는 단지 물건이었다"는 말을 남긴 채 메이저리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플로드의 비극을 지켜본 메이저리그선수협회는 선수의 기본권과 인격을 침해하는 보류선수제도의 보완과 수정을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에 들어갔다. 선수노조는 1975년 단체협상을 통해 1977년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에서 6년을 보낸 선수는 자유계약을 할 수 있도록 인정한다'는 개정을 이끌어 냈으며 다저스의 투수 앤디 매서스미스는 자유계약선수 제도의 혜택을 받고 팀을 옮긴 첫 번째 선수로 기록됐다.
이후 메이저리그 연봉은 급격하게 늘었으며 수많은 선수들이 보류선수제도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결국 커트 플로드가 던진 계란에 바위가 깨진 것.
이전에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이 현실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커트 플로드와 캣피시 헌터 그리고 앤디 매서스미스의 도전에 '혁명가' 마빈 밀러가 동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빈 밀러
1917년 뉴욕에서 태어난 마빈 밀러는 1950년부터 미국의 철강 노조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노동운동가였다.
선수들의 요청으로 1966년 메이저리그선수협회 상근위원장을 맡으며 메이저리그에 발을 디딘 밀러는 평생을 노동현장에서 싸우면서 터득한 놀라운 협상기술과 지도력으로 당시 모래알 같기만 하던 이기적인 선수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밀러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무려 20년 만에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최저 연봉을 끌어 올리는 등 선수들의 권익을 찾아주기 위한 그의 노력은 1973년 선수와 구단 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중재위원회를 만드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선수와 구단의 분쟁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대에 분쟁을 해결하는 중재위원회가 설립된 것은 보류선수제도라는 악법의 틀을 깨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밀러가 만든 중재위원회로 인해 1974년 캣피쉬 헌터가 메이저리그 최초의 자유계약선수가 될 수 있었다.
마빈 밀러는 1966년, 불과 5400달러의 빈약한 재정을 가지고 있었던 메이저리그선수협회를 미국에서 가장 효과적이며 성공적인 노동조합으로 발전시켰다.
1982년 사임을 할 때까지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수많은 업적을 이루어냈지만 그 중에서도 마치 물건처럼 취급받던 선수들이 구단과 대등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게 만든 'FA제도'가 마빈 밀러가 이룬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고 있다. 자신을 내던진 커트 플로드의 '용기'와 마빈 밀러의 '혁명'이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낸 것.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처우와 불합리한 제도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틀을 깨려하거나 벗어나지 못하고 순응하면서 살아간다. 자신들의 작은 힘으로 부딪히기에는 상대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르는 엄청난 불이익도 두렵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부조리에 순응을 하고 살며 그 틀 안에서 보호받고 사는 것에 만족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를 깨닫고 온몸으로 맞서 싸우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절망적인 도전을 했던 커트 플로드와 마빈 밀러처럼….
커트 플로드와 마빈 밀러는 아무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부당함'이라는 거대한 바위를 향해 '용기와 신념'이라는 계란을 힘껏 던진 위대한 도전자로 메이저리그 역사에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데일리안 스포츠/ 이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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