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 포 츠/아시아 메이저리거

포스팅시스템의 개척자, 이라부

leekejh 2012. 11. 13. 16:18

 

       [최민규의 친뮤직]

                   포스팅시스템의 개척자, 이라부

 

                                                                                                 다음스포츠 2012. 11. 13

 

 

이태일 NC 다이노스 사장은 류현진의 280억원짜리 포스팅 결과에 대해 "팀은 돈을 벌고, 선수는 부자가 되며, 팬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를 얻는다. 이상적인 리그의 모토"라고 평했다. 류현진도, 한화 이글스도, 야구 팬도 행복하다. 하지만 류현진이 내년 미국으로 갈 수 있게 한 제도를 만든 선수는 행복하지 못했다. 그는 2011년 7월 27일 미국 LA 자택에서 쓸쓸히 숨진 이라부 히데키다.

 

 

 

 

포스팅시스템은 1998년 발효된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야구와의 비FA선수 이동에 관한 협정이다. 한미 간에도 같은 협정이 맺어졌으며, 첫 사례는 한국 투수 이상훈이었다. 포스팅시스템은 1996년 겨울 빚어진 '이라부 파동'의 결과물이다.

1996년 이라부는 자신의 두 번째 퍼시픽리그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따낸다. 그는 세 번째 타이틀 도전을 일본에서 할 마음이 없었다. 1년 전 지바 롯데 감독이던 바비 발렌타인은 그에게 메이저리그 도전을 권했다.

지바 롯데 구단도 호의적이었다. 어차피 이라부는 1년 뒤 FA가 되는 선수였다. 이라부를 거저 빼앗기느니 그를 원하는 다른 구단으로부터 반대급부를 얻는 게 이득이었다. 그 '구단'이 일본에 있지 않다면 금상첨화다. 마침 지바 롯데는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와 포괄적 업무협약을 맺고 있었다. 샌디에이고 구단은 '일본의 놀란 라이언'으로 불리던 이라부의 대가로 수준급 타자 몇 명을 줄 수 있었다. 노모 히데오가 일으킨 돌풍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일본 투수에 대한 평가는 전례없이 높아져 있었다.

하지만 이라부가 원한 팀이 샌디에이고가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다. 이라부는 "뉴욕 양키스가 아니면 미국으로 가지 않겠다"고 했다. 지바 롯데 구단은 격분했다. 그를 미국에서 뛰도록 허락하는 것 자체가 '은전'이었다. 구단 입장에서 이라부는 뻔뻔한 이기주의자였다. 반대로 이라부 입장에 샌디에이고로의 이적은 '선수가 원하지 않는 트레이드'였다.

전 세계 모든 프로야구리그에서 선수는 거부권이 없는 이상 구단의 트레이드 지시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이라부의 에이전트 돈 노무라는 1967년 체결된 미일야구협정에서 양국 구단 간 트레이드에 관한 규정이 불분명하다는 점에 착안했다. 노무라는 "과연 샌디에이고가 지바 롯데로부터 이라부를 트레이드해 올 수 있는지 미국 법정에서 따지겠다"고 맞불을 놨다. 양측의 대립은 구단이 한 발 물러서면서 일단 해소됐다. 지바 롯데는 이라부에게 "양키스 이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대신 실패할 경우 구단의 뜻에 따르겠다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했다.

지바 롯데와 양키스와의 교섭은 실패했다. 신동빈 지바 롯데 구단주는 직접 이라부와 노무라를 불러 이를 통보하며 "자네는 더 이상 우리 팀 선수가 아니네"라고 말했다. '1997년 1월 13일 지바 롯데는 샌디에이고가 이라부에 대한 독점교섭권을 가진다고 공식 발표했다. 구단의 뜻'이 결정한 샌디에이고와의 계약조건은 3년 기간에 총액 600만 달러였다. 대신 샌디에이고는 지바 롯데로 마이너리그 투수 셰인 데니스와 외야수 제이슨 톰슨을 보냈다.

이라부는 "노예계약"이라고 맞서며 다시 샌디에이고행을 거부했다. 구단 측은 이라부가 서명한 문서를 공개하며 그를 이기주의자로 비난했다. 이 상황에서는 약속을 파기한 이라부 쪽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지바 롯데는 '최선'을 다했을까. 저널리스트 로버트 화이팅에 따르면 당시 지바 롯데가 양키스에 제시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1루수 세실 필더를 넘겨줄 것 2) 1997년 필더의 연봉 절반을 양키스가 부담할 것. 필더는 1996년 39홈런을 쳤고, 이듬해 연봉은 924만 달러였다. 누가 봐도 '최선'은 아니었다.

1997년 2월 메이저리그 실행위원회가 이라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됐다. 실행위원회는 "1967년 협정은 양국 구단 간 트레이드를 명시적으로 금지하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트레이드 대상이 된 선수의 권리 문제에 대해서는 "우려가 있지만 실행위원회 소관이 아님"이라고 선을 그었다. 지바 롯데와 샌디에이고의 선수 거래를 승인한 셈이다. 이라부는 사면초가에 몰렸다. 일본으로 돌아갈 길도 막혔다. 지바 롯데는 지난 행적에 대한 공개 사과와 함께 "영원히 메이저리그에서 뛰지 않겠다"는 약속을 이라부의 복귀 조건으로 내걸었다.

웬만한 선수라면 여기에서 단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라부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스프링캠프를 포기하면서까지 샌디에이고 입단을 거부했다. 결국 샌디에이고가 손을 들었다. 샌디에이고는 1997년 5월 뉴욕 양키스에 이라부를 트레이드한다고 발표했다. 대가는 유망주 두 명과 현금 300만 달러였다.

선수 동의 없는 트레이드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이라부 파동은 메이저리그 1960년대의 커트 플러드 사건과 닮아있다. 물론 다른 각도의 해석도 가능하다. 이라부가 양키스에 입단하기 직전 일본프로야구 커미셔너 사무국은 메이저리그에 양키스를 탬퍼링(사전접촉) 혐의로 고발했다. 이라부가 양키스와 공모해 야구계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시각은 아직 남아 있다. 확증은 없지만 프로야구는 이와 비슷한 일이 가끔 일어났던 곳이다.

그 내막이야 어쨌든 이라부 파동은 포스팅시스템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낳았다. 이 제도의 출발은 '우수 선수를 특정 구단이 독식해선 안 된다'는 메이저리그 구단, 특히 재력이 강한 구단의 이해 관계였다. 초기에는 '메이저리그 입맛에 맞는 제도'라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15회 가량의 역대 포스팅 결과는 특정 리그에게만 유리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포스팅시스템은 불완전하고, 개선의 여지가 있으며, 때론 실패작이라는 혹평도 듣지만 이전에 비해서는 여러 사람을 만족시키는 제도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이라부 파동은 선수의 제도적 권리 보장에도 기여를 했다. 메이저리그 노사협약에는 "선수의 서면 동의 없는 해외 이적은 불가능하다"는 조항이 있다. 메이저리그 선수 뿐 아니라, 메이저리그 이적이 예정된 외국 리그 선수에게도 적용된다. 이 조항은 1997년 이라부 파동 뒤 신설됐다.

2011년 이라부가 세상을 떠난 뒤 에이전트 노무라는 화이팅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이치로, 마쓰이, 마쓰자카는 모두 이라부의 용기와 의지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이라부는 어떤 전례도 없는 가운데 순전히 옳은 일이냐, 그른 일이냐는 기준에 따라 결정을 내렸다. 그는 '내가 포기한다면 모든 선수가 해외 이적을 거부할 권리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했다."

최민규 기자didofido@joongang.co.kr